명함 없이 주고받는 새해 인사의 진가[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연초에 동창 대화방에 글이 올라왔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아.’ 짤막한 인사에 모두가 반응했다. 건강해라, 소원 성취해라, 신년에 나누는 온갖 덕담이 오갔다. 순간 한 친구가 즉석 만남을 제안했다. 날짜는 돌아오는 화요일 저녁, 장소는 교통이 편하고 북적대지 않는 식당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처음에는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퇴직자는 나 혼자였고 나머지는 직장인, 프리랜서, 자영업자였다. 누구는 업무가 많아 정신이 없다고 했고, 누구는 손님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다 주제는 지난 시절로 넘어갔다. 한창때 자진 퇴사해 고생했던 상황, 결혼 생활 중 닥쳐온 위기 등 살면서 맞았던 인생의 굴곡들을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각자의 감춰진 이면을 마주하며 밤늦도록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이제야 서로에게 솔직해졌을까. 아마도 더 이상 타인을 평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승진도, 성과도, 비교도 중요하지 않았다. 잘되면 잘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숨김없이 털어놔도 괜찮은 나이가 됐다. 특히 친구들보다 먼저 퇴직한 나는 뒤처진 사람이 아니라 그저 일찍 떠나온 사람이었다. 내 경험은 그들에게 미래의 이정표가 돼주고 있었다.

며칠 뒤 또 다른 새해 인사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봉사활동을 하는 곳에서 만난 학생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갖가지 이모티콘을 섞어 길게 안부를 물었고, 남자아이들은 짧지만 묵직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나를 향한 마음은 비슷해 보였다. 아이들이 보낸 문자 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이 활동하는 선생님들의 연락도 특별했다. 새해에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한마디에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복 받으라는 의례적인 문구보다, 함께여서 좋다는 짧은 메시지가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회적 명함 없이 오직 나 자체로 인정받는 기분이랄까. 그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사실 직장 생활에서의 새해 인사는 형식과 의무에 가까웠다. 덕담을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위치를 가늠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은 없는지를 계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직 후는 달랐다. 그 안에는 어떠한 기대도 의도도 없었다. 퇴직자에게 새해 인사란 ‘나는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란 고백이었다. 덕분에 나는 몇 통 안 되는 글들을 반복해 읽으며 올해를 살아갈 큰 힘을 얻었다.

솔직히 나 역시 퇴직자라면 대부분 겪는 사람 사이의 아픔을 피해 가지 못했다. 퇴직과 동시에 연락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걸까,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걸까, 깊이 시름하다 전화번호를 몽땅 지울까 고민했고, 회사는 본래 그런 곳이라며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모든 행동은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상처를 피하려는 서툰 방어에 가까웠다.

그 시기를 지나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인간관계의 진짜 모습은 명함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어떤 인연은 역할이 끝나자 조용히 멀어졌고, 어떤 인연은 이해관계가 없어진 뒤에야 얼굴이 선명해졌다. 결국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은 직위가 아닌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퇴직은 사람을 잃는 아픈 시간이 아니라 참된 관계를 다지는 계기임이 분명했다. 잠겨 있던 마음의 빗장도 그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올해는 작은 계획을 세웠다. 새로운 이들을 사귀기보다 현재 곁에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 좀 더 정성을 쏟기로 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친밀하게 대해 볼 생각이다. 내가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누가 나에게 속사정을 털어놓는지를 살피며 관계의 온도를 높여가려 한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만남의 폭을 넓히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연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흔히 인맥을 자산이라고 말한다. 퇴직을 하고 보니 그 말뜻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퇴직자에게 인맥 자산이란 잘나가는 지인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몇 사람, 내 빈자리를 기꺼이 채워주고 나도 마찬가지로 옆에 있어 주고 싶은 상대가 있는지였다. 그런 이들과 연결돼 있기만 해도 퇴직 후 삶은 한결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올 1월은 나에게 유독 따스하게 느껴진다. 한 해를 함께할 사람들을 그려보면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관계란 붙잡는 기술이 아니라 놓아주는 용기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이번 신년 인사를 나누며 다시금 실감했다. 혹시 이 순간 내 연락을 반가워할 얼굴이 스쳐 간다면, 이제라도 안부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퇴직#새해 인사#인간관계#동창 모임#인맥 자산#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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