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17〉

  • 동아일보

감량 중인 복서는 말린 표고를 물고 하루를 겨우 버틴다 한다 저녁이 되면 접시에 버섯을 뱉는데 몽실몽실한 것들이 접시에 구른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나면 침이 말라 표고도 부풀지 않는데 스테인리스 그릇에 표고를 뱉으면 깡깡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바로 그때 복서는 새처럼 가볍다 귀와 코에 폭포와 벼랑을 달고 아주 작은 풀벌레 소리도 듣는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그렇게 떠났다

―고명재(1987∼ )


시인이 되기 전 고명재 시인은 오직 시인이 되기 위해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시를 썼다고 한다. 그건 어떤 일인가? 표고를 입에 물고 종일 고된 훈련을 하는 복서의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복서가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킨다면 시인은 영혼과 감각기관, 몸의 에너지(기·氣)를 단련시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이 과정을 ‘싸움’이라 명명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단식하고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내어 종국에 새처럼 가볍게 되는 일. 내 몸을 내 의지 아래 두고, 정신과 몸이 합일을 이룰 수 있게 훈련하는 일은 싸움이다. 나와 몸, 나와 정신, 나와 나의 싸움이다. 감량 중인 복서는 종일 입에 물고 있던 표고를 삼키지 않고 그마저도 접시에 뱉는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표고를 뱉으면 깡깡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표고를 상상해 보라. 표고가 지닌 진액과 영양분, 표고의 영혼까지 복서에게 이양되고 이제 ‘깡깡소리’만 남은 표고는 새처럼 잠드는 것이리라.

무언가 간절한 사람들은 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귀와 코에 폭포와 벼랑을 달고 아주 작은 풀벌레 소리”까지 감지해 낼 수 있으려면 새가 되는 수밖에 없다. 시인이 사랑했던 이들도 결국 이렇게 가벼워진 채 떠났다니, 아름답지 않은가. 날 수 있을 만큼 존재가 가벼워진 자들과의 이별.

#복서#감량#표고버섯#단식#싸움#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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