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선택받는 나라’인가[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8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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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세계적 기업은 키우기도, 지키기도 어렵다.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장비회사 ASML의 외국 이전을 막기 위해 25억 유로를 투입하는 ‘베토벤 프로젝트’를 부랴부랴 가동한 걸 봐도 그렇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끌어당기는 바람에 혁신기업을 지키는 일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ASML 사태의 본질은 ‘인재 전쟁’

네덜란드의 국가대표급 기업인 ASML을 나라 밖으로 밀어낸 원심력은 선거와 정치적 선택이었다. 인구 1767만 명의 네덜란드는 세계의 인재들이 찾는 ‘이민 강국’을 건설하고 한국의 삼성, 대만의 TSMC도 쩔쩔매는 ASML을 키웠다. 네덜란드에서 일하는 ASML의 직원 2만3000명 중 약 40%가 외국인이다. 그런데 지난해 네덜란드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극우 정당이 외국인 숙련 노동자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줄이고 유학생 수를 제한하는 반(反)이민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외국 인재 의존도가 높은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는 당장 “회사가 성장할 수 없다면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반발했다.

ASML이 민감하게 반응한 건 치열한 ‘인재 전쟁’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핵심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거액을 주고 스타트업을 사들이는 ‘인재 인수(acquihiring)’까지 시도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예 AI 스타트업 인플렉션의 창업자 3명 중 2명을 한꺼번에 영입했다. 이런 판국에 외국 인재 채용에 빗장을 거는 정치적 선택으로 역주행한 네덜란드는 막대한 세금을 투입하는 대가를 치르게 생겼다.

미 민간기업 최초로 달 착륙을 이뤄낸 우주 스타트업 인튜이티브머신스의 창업자 캄 가파리안(66)은 열한 살 때 고향 이란에서 TV로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장면을 지켜보며 우주 개척의 꿈을 키운 이민자다. 인튜이티브머신스의 달 착륙선을 우주로 쏘아 올린 미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이민자다. AI 반도체로 잘나가는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은 대만계, 래리 페이지와 함게 구글을 창업한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인도 첸나이 출신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건 세계의 ‘고급 두뇌’들이 첨단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창업을 통해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이민 강국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통용되고 학교 병원 등 정주 여건이 좋아 외국인이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싱가포르는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해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고성장 500대 기업 중 93곳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90곳)이나 도쿄(71곳)보다 많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겪으며 ‘공생 사회’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2018년 이후 ‘선택받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학생 유치와 정착, 고급 외국 인력 확보에 나섰다.

글로벌 인재가 선택하지 않는 나라는 낙오

한국은 체류 외국인이 약 250만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외국인은 건설 현장이나 농장 등 기피 업종에서 일한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그렇다고 외국 고급 인재들로부터 ‘선택받는 나라’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인재유인지수 평가에서 한국은 유학생 유인 측면에서 37개국 중 9위를 차지했다. 석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 유인 측면은 25위, 기업가는 16위, 스타트업 창업자는 18위에 그쳤다.

10일 총선에서 선택될 22대 국회는 이민 강국 밑그림과 같은 ‘미래’와 ‘국민’을 위한 논의를 훨씬 더 치열하게 해야 “달라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글로벌 인재로부터 선택받지 못하는 나라는 인재 전쟁에서 낙오하고 앞으로 ASML과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우기도, 지키기도 어렵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asml 사태#인재 전쟁#글로벌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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