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황제의 아킬레스건은 아내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6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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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 가려졌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도 퍽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물론 스콧 경이 한국 상황을 고려했을 리 없다. 프랑스에선 영국 출신 감독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나폴레옹을 찌질하게 연출한 반(反)프랑스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란 평가도 분분하다.

“영화가 다큐멘터리냐?” 일갈했다는 감독은 최근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렇게 막강하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아킬레스건을 가질 수 있을까. 나폴레옹에게 아킬레스건은 한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핵심을 파고들었던 거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관계라는.”

조세핀이 나폴레옹에게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You are nothing without me)”라고 말하는 장면. 예고편 캡처
조세핀이 나폴레옹에게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You are nothing without me)”라고 말하는 장면. 예고편 캡처
“위대해지고 싶겠지.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아냐, 나 없이는. 말해봐(You want to be great. You are nothing without me. Say it).” 유럽 인구 절반을 다스린 제국의 황제가 나폴레옹이다. 그런 위대한 남자를 손끝으로 가지고 놀던 유일한 사람이 조세핀이었다. 날름거리는 촛불 아래 그 여자가 속삭이듯, 아니 씹어 뱉듯 이렇게 말하는데 불현듯 우리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 “당신은 아무것도 아냐, 나 없이는”
작년 1월 MBC ‘스트레이트’ 가 방송되기 전, 당시 대통령 후보 부인이었던 김건희 여사가 7개 내용에 대해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다. 안타깝게도 내용이 유출돼 버렸는데 그 중 하나가 이거였다. “우리 남편은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저 사람 완전 바보다.”

내가 아는 많은 남자들은 껄껄 웃었다. 실은 자기도 집에서 만날 듣는 소리라며 그게 무슨 대수냐고 했다. 참 속도 좋다. 남편이 집에서 라면 하나 못 끓여먹어 마누라가 챙겨줘야만 한다는 투정과,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 얘기는 같은 급이 아니다. 국정까지 대통령 부인이 챙겨줘야만 뭐라도 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면, 나라엔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 출처 영화 스틸컷
영화 속에서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 출처 영화 스틸컷
스콧 감독이 해석하는 영화 속 나폴레옹은 그런 모습이다. 전쟁터에선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을지언정 조세핀 앞에선 바보멍청이일 뿐이었다. 유럽 대륙을 정복한대도 사랑이라는 전쟁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敗者)다. 이건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사랑하지 않았고, 이혼할 때야 비로소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고(조르주 보르도노브 ‘나폴레옹 평전’).

● “가장 행복한 기억은 아내를 만난 것”
윤석열 대통령은 올 4월 미국 국빈 방문에 앞서 워싱턴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서 늦게, 50(살)이 다 돼서 제 아내(김건희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대통령 취임 1년이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그것도 미국 방문을 앞두고 윤 대통령은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대통령 당선’도 아니고(정권교체를 원했던 다수 국민은 구국의 심정으로 2번을 찍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아니고, 김건희 여사와의 결혼을 언급한 거다. 이런 개인사 발언이 대통령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주는 측면은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나의 아킬레스건은 내 아내’라고 공표한 것과 다름없다.

올해 3월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전남 지역을 방문한 이후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김건희 여사의 단독 사진. 대통령실 홈페이지 캡처
올해 3월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전남 지역을 방문한 이후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김건희 여사의 단독 사진. 대통령실 홈페이지 캡처
윤 대통령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준 사람이 대통령 부인인데 누가 감히 “여론이 안 좋은데 김 여사와 처가를 감시하는 특별감찰관을 둬야 한다” “대통령비서실에 김 여사 일정과 예산을 담당하는 제2부속실을 따로 둬야 한다”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나(원래 이렇게 ‘짖어대라’고 비서실장이 있는 거라고 도널드 럼스펠드는 강조했다). 대통령과 대통령부인 활동이 별도 게시되는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와 달리 우리 대통령실엔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 사진이 함께 올라가 있다. 그래서 용산에서 VIP1, VIP2 소리가 나오는 거다(심지어 VIP제로란 말도 들린다).

● 황제의 아내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조세핀은 어려서 점쟁이한테 프랑스 여왕이 된다는 운명적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너무나 여성스럽고 우아해 남들이 몰라봤을 뿐, 남자를 조종할 줄 아는 조세핀은 노련한 정치가였다. 영화에선 조세핀의 부정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부랴부랴 오는 걸로 나오지만 실은 나폴레옹이 소환 명령도 안 받고 돌아올 것이란 정보를 경무대신 푸셰에게 전해준 스파이가 바로 조세핀이었다(슈테판 츠바이크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온통 황제뿐인 주변국과의 관계를 위해 후계자를 필요로 한다. 결국 ‘국민의 이익’을 우선해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을 택하는 것이다. ‘행운의 별’ 조세핀과 헤어진 뒤 패배를 거듭하다 죽음 앞에서 듣는 그 여자의 환청은 섬뜩하다. “내가 당신을 파멸시켰지. 다음 생엔 내가 황제가 되고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될 거야.”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 배우 바네사 커비가 연기했다.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 배우 바네사 커비가 연기했다.
실제로 조세핀은 제1통령의 아내로서, 황제비로서의 역할은 훌륭하게 해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앙드레 모로아는 ‘프랑스사’에서 파리는 조세핀에게 ‘승리의 성모’라는 칭호를 바쳤다고 했다.

● 김 여사 “이 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노련한 독자들은 내가 왜 먼 길을 돌아왔는지 알 것이다. 검찰은 인터넷매체 서울의소리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고발함에 따라 15일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에 대해소환 조사 없이 서면 조사만 했다는 검찰이 명품백 수수 의혹이라고 바짝 수사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두고 볼 일이다.

작년 9월 그 명품백을 받은 자리에서 몰래 찍었고 올해 11월 말 공개한 그 영상에서 자칭 통일운동, 보통 친북 활동가로 알려진 재미교포 목사에게 김 여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까 객관적으로 전 정치는 다 나쁘다고 생각해요” “막상 대통령이 되면 좌나 우나 그런 거보다는 진짜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게끔 되어 있어요. 이 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김 여사는 과거 공개된 녹취록에서 “내가 정권 잡으면 하하하 거긴 무사하지 않을 거야”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도 아니고, ‘남편이’도 아니고, ‘내가 정권 잡으면’이다. 그런 의식이 살아 있으니, 그리고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으니 이 영상에서도 “저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끊어지면 적극적으로 남북문제 (해결에) 나설 생각”이라며 “우리 목사님도 한번 크게 저랑 같이 일하자”고 작년 9월 마치 대통령처럼 말한 게 아닌가 싶다.

● “드러나지 않게 잘하라고 했다”더니
대통령 선거 전에 했던 김 여사의 사과를 전 국민이 기억한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올 초 윤 대통령은 한 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취임해 보니 배우자도 할 일이 적지 않더라”며 “드러나지 않게 겸손하게 잘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윤 대통령만 모르고 있다면, 개인적 희극에 그치지 않는다. 나라의 비극이다.

작년 9월 ‘도발’ -‘“우리 남편은 바보”…녹취록은 윤석열 리스크였다’에서 나는 스페인 방문 때 둘렀던, 재산신고 때 빼먹은 6200만 원 짜리 반 클리프 앤 아펠 목걸이도 늦었지만 신고하고(아, 지인에게 빌렸다니 선물 반환 창고에 보관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감찰관도 임명해 ‘김건희 리스크’를 끊어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대통령의 애처증은…안타깝지만 죄다. 나폴레옹의 아킬레스건이 조세핀이듯, 윤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은 김 여사다.

▶[김순덕의 도발]“우리 남편 바보”…녹취록은 ‘윤석열 리스크’였나
https://www.donga.com/news/dobal/article/all/20220925/115637839/1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반복한다. 내년 총선에서 폭망하지 않으려면, 곧 구성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쫓기듯 임명하지 않으려면, 특별감찰관과 제2부속실장 임명을 윤 대통령 스스로 속히 단행하는 게 낫다. 그것이 영화 속 나폴레옹처럼 국민의 이익을 우선하는 길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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