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해준다’고 한다 [동아광장/최인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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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노력으로 월급 받겠다는 ‘조용한 퇴사’
주인의식 없어 새 경험과 통찰 쌓기 힘들 수도
당신은 일을 해주는 사람인가 하는 사람인가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서면 많은 점원들이 이렇게 말한다. “고객님, 계산 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 말이 영 불편하다. 이상하지 않나? 계산은 점원의 일인데 왜 도와준다고 하는 걸까? 도와준다는 것은, 원래는 자신의 일이 아니나 선의로 다른 이의 일을 거들거나 대신 해주는 것이다. 물건값을 계산하고 돈을 받는 것은 애초부터 손님이 아니라 점원의 일이니 도와준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나는 영 불편하다.

‘아이와 놀아주다’라는 말도 살펴보자. ‘아이와 놀아주려니 체력이 달린다’, ‘주말엔 아이와 놀아줘야 해서 시간이 없다’ 등 아빠들은 아이와 논다고 말하는 대신 아이와 놀아준다고 말한다. 아내를 대신해서, 혹은 바쁘고 힘든 아내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까? 물론 엄마 이상으로 아이를 꼼꼼하게 돌보는 아빠도 많고 또 육아를 자신의 일로 여기는 젊은 아빠도 요즘은 많다. 그럼에도 SNS에 올라오는 아빠들의 글엔 여전히 아이와 놀아준다는 말이 많이 보인다. 이 말에도 ‘해준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듯하다.

직장인들 또한 그렇다. 자신의 업무를 하면서 회사 일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대개가 그렇듯 광고회사의 회의도 일정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제작팀은 AE(Account Executive·광고대행사를 대표해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며 영업을 맡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해주면 돼?”라고 물으며 일정을 챙긴다. 한데, 나는 그 말이 거슬렸으므로 제작본부장이 되었을 때 후배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제작은 제작의 일을 하고 AE는 AE의 일을 하는 것이지 그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앞으론 ‘언제까지 해주냐’라 하지 말고 ‘언제까지 하면 돼?’라고 하자.” 다 아는 것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생각의 집이어서 말은 우리가 그 사안을 대하는 시선을 담고 있다. 즉,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말에 주목하고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에게 귀 기울인다.

요즘 ‘조용한 퇴사’가 화두다. 회사를 그만두진 않지만 회사와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노력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선 기업의 리더나 인사 부서에 비상이 걸렸겠다. 집중하고 몰입해도 모자랄 판에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성과나 생산성이 좋을 리 없으니 말이다.

나는 여기서 기업의 입장보다 ‘조용한 퇴사’를 택한 구성원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다. 조직 문화나 회사의 업무 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안이 마땅치 않아 계속 다녀야 할 때 그런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용한 퇴사’ 중에도 구성원들은 업무를 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다시 없을 우리들의 소중한 인생이다. 돌아보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희소하며 돌이킬 수 없는 자원은 시간이었다. 그런 자원을 그렇게 쓰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업무를 끝낸 일과 후나 주말만 인생이 아니고 업무 시간도 엄연한 인생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고 뜻이 맞지 않으면 다른 대안을 알아보고 택하되, 지금 있는 곳에서 일하는 동안은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라는.

물론, 회사의 주인도 아닌데 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을 줄 안다. 나는 이런 답을 하고 싶다. 회사의 주인이 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고.

‘조용한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숱한 고민이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하기로 한 이상 그 일은 자신의 일이다. 그저 회사의 일을 월급 받는 대가로 해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정해진 월급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받으니 일견 가성비가 높아 보이지만, 이 생각엔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일을 통해 우리는 월급만 취하는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도 일어나고 새로운 경험과 통찰도 쌓이며 뜻이 다른 사람과 일할 때의 스킬도 배운다. 월급만 받아가지 않고 이 모든 걸 다 취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가 아닐까? 그러니 회사 일을 해주는 게 아니라 일의 주인이 되어 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나는 일을 해주는 사람인가? 하는 사람인가?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조용한 퇴사#최소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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