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신냉전이 불러낸 ‘전범’ 군사대국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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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빠진 美 대신해 日·獨 재무장 가속화
‘신뢰받는 역할’ 이끌 주변국 책임 크다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지난 주말 독일 북부 빌헬름스하펜 항구에선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 준공식이 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 정부가 러시아에 의존하던 가스 수입의 55%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이 터미널을 통해 축구장 3개 크기의 특수선박(FSRU)에서 기화된 가스가 곧바로 육지에 공급된다. 몇 년은 걸릴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독일은 10개월 만에 건설을 마쳤다. 이런 터미널 4곳이 추가로 속속 들어선다.

신중한 언사로 유명한 올라프 숄츠 총리지만 이날만큼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가스 공급을 막아 우리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틀렸다. 올해 안에 터미널을 완공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정반대였다. 우리는 대단한 속도로 해냈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독일의 템포다.”

독일의 행보는 빨랐다. 에너지 안보에서 탈(脫)러시아로 선회하는 한편 군사력 증강에도 신속히 나섰다. 일본이 최근 반격능력의 확보와 국내총생산(GDP) 2%로의 방위비 증액을 공식 의결했지만, 독일은 이미 6월에 헌법까지 개정해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방위기금을 조성했다. 독일은 2024년까지 방위비를 GDP 2%로 끌어올리게 됐고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군사비 지출 국가 자리를 일본보다 먼저 예약했다.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래 전범국가로서 ‘강요된 평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랬던 두 나라가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미중 전략경쟁 속에 빠르게 재무장하고 있다. 승전 5개국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체제로 상징되는 전후 국제질서가 막을 내리는 셈이다. 이 모든 게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저물면서 비롯됐다. 미국은 이제 한발 빠지면서 지역 국가에 부담을 넘기는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재군비 속도전은 두 나라의 국가 정체성마저 바꾸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오직 수비에만 전념한다는 전수(專守)방위 원칙도, 무기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평화주의 원칙도 깨졌다. 군사력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지키는 든든함을 주지만 한번쯤 휘둘러보고 싶은 근질거림도 낳는다. 77년간 잠들었던 괴물 본능을 깨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다.

두 나라의 행보에 주변국의 경계심이 높아질 법한데도 워낙 거센 신냉전 기류 탓에 큰 우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독일의 경우엔 전쟁범죄에 대한 독일의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집단안보체제 내부의 통제, 즉 독일의 충동을 막을 주변국의 견제와 균형의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주변국은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의 태도도 문제인 데다 동아시아 안보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자적 바큇살(hub & spoke) 동맹 구조여서 일본의 힘자랑을 억제할 지역 내 견제 시스템이 없다. 그렇다고 먼 바다 너머 미국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그래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북한 중국의 위협에 맞선 한미일, 한일 안보협력은 불가피하다. 한국은 일본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본이 신뢰받는 나라가 되도록 진정 어린 과거사 반성을 끌어내는 한편으로 일본의 군사 활동이 한반도 위기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한국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신냉전#전범#군사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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