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 겁박에 맞선 호주의 ‘조용한 완승’ [오늘과 내일/이철희]이른바 ‘늑대전사 외교’와 함께 중국식 겁박 외교의 대명사가 된 ‘경제적 강압’을 국제사회가 맞서 싸워야 할 핵심 이슈로 공론화한 나라는 호주였다. 2020년 호주가 중국의 코로나19 기원과 책임 규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자 중국은 대놓고 호주의 국내 정치에 간섭하고 언론 논조까지 문제 삼으며 호주산 보리와 와인, 석탄, 목재, 바닷가재의 수입을 막는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다. 대중국 수출 비중이 37%에 달한 호주로선 전례 없는 위기였다. 호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동맹과 우방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중국의 강압에 맞선 대항전선 구축을 촉구했다. 호주 외교장관은 외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안주머니에서 중국 측이 던진 모욕적 요구, 이른바 ‘14개 불만 사항’ 메모지를 꺼내 보이며 분노와 결의를 표시하곤 했다. 그런 호주의 배짱은 통했다. 호주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일시적이었다. 잠시 위축됐던 호주의 대외 수출은 다시 치솟았고 작년엔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미 올해 초 호주산 석탄을 사들이기 시작한 중국은 최근 목재 수입을 재개하고 보리에 매긴 80% 관세도 재검토에 들어갔다. 중국이 부과한 무역장벽이 거의 다 철회된 것이다. 사실상 완벽한 호주의 승리였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상어의 공격으로 뜯긴 보드에 의지해 살아 돌아온 서퍼처럼 호주는 놀랄 만큼 강건한 모습으로 부상했다”고 극찬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3월 말 ‘거부하고 뿌리치고 억제하라’는 제목으로 낸 보고서도 중국의 강압이 목표 달성은커녕 역효과만 냈다며 호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표적이 됐던 8개국 사례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강압은 미미한 성공에 그친 전반적 패착이었다고 진단했다. 호주 리투아니아에선 전술적·전략적으로 모두 실패했고, 한국 일본 캐나다에선 엇갈린 전술적 성패 속에 전략적 실패를 맛봐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보다 리스크가 적은 경제적 강압을 앞세운다. 경제적 약소국과 비대칭 우위 분야를 표적으로 삼아오던 중국은 최근 미국의 최대 메모리칩 제조업체 마이크론에 대해 ‘안보 위협’을 이유로 제재를 가했다. 미국은 “명백한 경제적 강압”이라고, 중국은 “미국이 협박 외교의 원조”라고 맞선다. 그 와중에 한국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우는 문제(backfilling)로 미중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 갔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중국은 미국과 한층 밀착하는 우리 정부를 향해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석연찮은 이유로 한국인 축구선수가 4주 가까이 구금돼 있고, 난데없이 한국 포털사이트 접속이 차단되는가 하면 연예인 방송 출연이 취소되는 등 조짐이 심상치 않다. 벌써부터 제2의 사드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 핵심 인사들은 중국의 오만한 기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당당한 외교’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에 저자세를 보일 이유는 없다. 동맹과 국제연대의 힘, 더욱이 중국에도 절실한 우리 반도체 기업이 있는 만큼 중국도 한국을 다시 표적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정교한 대응책, 나아가 예방적 관리외교일 것이다. 호주가 중국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데는 그 배짱 못지않게 자원부국이란 행운이 작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호주의 철광석은 중국도 건드리지 못하는 든든한 지렛대가 됐고, 중국 수출이 막힌 품목들은 쉽게 대체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 정권교체의 효과도 한몫했다. 새 정부는 “용(龍)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며 조심스럽게 중국에 퇴로를 열어주는 실용외교를 폈다. 요즘 호주는 그 승리를 드러내놓고 자랑하지도, 국제무대에서 중국에 날을 세우지도 않는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2023-06-07 23:44 
푸틴, 트럼프 복귀 기다리나 [오늘과 내일/이철희]흔히 전쟁은 시작하기는 쉬우나 끝내기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5개월 정도면 끝난다고 한다. ‘전쟁 종결’ 이론가인 하인 호먼스 미국 로체스터대 교수는 전쟁의 50%가 5개월 안팎을 끌다가 비교적 신속하게 끝났다고 분석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힘과 의지를 파악하는 진실의 순간이 오고, 그런 현실과 전망 아래 서로 양립 가능한 조건을 맞춰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은 꽤 장기화되는데, 그건 다른 차원의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호먼스 교수는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경우다. 1914년 개전 4개월 만에 독일 황제와 내각, 총참모부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 뒤 러시아로 진군한다는 단기결전의 슐리펜 계획은 일찌감치 실패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독일은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고 이후 참혹한 지구전이 4년이나 이어졌다. 그 이유는 뭘까. 실패를 인정하면 곧 국내 혁명을 불러 체제가 전복될 것이라는 권력 지도부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이런 딜레마는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는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러시아가 며칠 안에, 적어도 몇 주 안에 끝낼 것이라던 전쟁은 앞으로도 최소 1, 2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21일 국정연설에서 전쟁의 모든 책임을 서방으로 돌리며 서둘러 끝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전쟁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러시아군, 아니 푸틴의 오판과 실책이 낳은 결과다. 전쟁 초기 러시아는 충분한 공습과 안정적 병참선도 없이 여러 전선에 걸쳐 지상군을 조급하게 진격시켰고 우크라이나의 항전에 막히면서 예봉이 꺾였다. 군사작전까지 일일이 챙기는 푸틴의 어처구니없는 개입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푸틴은 뒤늦게 방어 체제로 전환하고 부분 동원령도 내렸지만 이미 전쟁은 끝도 없이 병력과 장비, 탄약을 쏟아붓는 소모적 장기전이 됐다. 어느덧 푸틴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퇴각, 특히 크림반도의 포기는 정권의 존립, 나아가 푸틴의 생명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푸틴의 국내 권력 기반은 탄탄하다. 푸틴은 전쟁을 지속할 동원 능력도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언제나 끝날까. 일방의 결정적 승리가 없다면 전쟁은 서방이든 러시아든 어느 한쪽이 탈진할 때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푸틴은 핵전쟁 협박으로 미국과 유럽의 직접 개입을 막으면서 서방의 분열을 노리고 있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변수 중 하나는 내년 말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는 상황이다. 벌써 트럼프는 “내가 대통령이면 2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미국에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과도하다는 여론도 늘고 있다. 푸틴의 전쟁은 전 세계의 진영 대결,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을 격화시키고 있다. 특히 러시아도, 서방도 무기와 탄약 창고가 비어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재래식 화력의 공급처로 주목받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 용병회사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한국도 우크라이나 지원 국가의 빈 무기고를 채우는 식의 간접 지원을 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어느 편인지 분명히 하라는 ‘진영 테스트’ 압박은 한층 강해질 것이다. 이미 서방은 한국에 직접적 무기 지원을 요청하고, 러시아는 “한-러 관계 파탄”을 경고하고 있다. 응당 민주진영 연대에 적극 나서야겠지만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리스크를 관리하며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2023-02-22 21:30 
[오늘과 내일/이철희]“말폭탄도 연애편지도 김정은에겐 먹혔다”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로 만들기 위한 주관적 노력일 뿐이다. 특히나 정치인, 여전히 큰 야심을 품고 있는 인물의 회고록은 자기 자랑과 변명으로 덧칠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 그 뒷얘기, 나아가 사후 평가는 어디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쏠쏠한 재미를 준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낸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Never Give an Inch)’도 꽤나 흥미롭다. 폼페이오의 책 출간은 내년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 나서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의 회고록은 여느 정치인이 선거 전에 내놓는 책과 달리 몹시 사납고 공격적이다. 자신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쓴 극한 전사이자 냉혈한 현실주의자로서 ‘아메리카 퍼스트’의 구현자임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래선지 철저히 당파적, 정쟁적이다. 민주당 인사는 물론 안보전문가, 언론인에게까지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낸다. 함께 일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 특히 공화당 경선의 잠재적 경쟁자들도 험악하게 깎아내린다. 반면 트럼프는 시종 변호한다. 자신은 트럼프의 총아(寵兒)로서 충직한 실행자였다고 자부한다. 트럼프가 부추긴 의사당 폭동 같은 불편한 얘기는 가급적 피한다. 과거 ‘트럼프 엉덩이만 쫓는 열추적 미사일’이라던 놀림을 상기시키는 이유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폼페이오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우선 트럼프가 김정은을 향해 날린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같은 말폭탄이 ‘역대 어느 행정부도 하지 못한 멋진 전략’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을 몇 달간 조용하게 만들었고 이후 북한이 쏜 미사일은 단 한 발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 한 발이 미국 전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었고 그 직후 김정은이 ‘핵무장 완성’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빼놓았다. 나아가 갑작스러운 대화 국면 전환도 외교의 창을 열어둔 결과라고 했다. 정상회담 약속만으로 인질 3명을 귀환시켰고,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선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과 핵·장거리미사일 시험 중단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비록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대가로 줬지만 “홈런은 아닐지라도 가치 있는 거래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해선 “나쁜 양보도, 나쁜 타협도, 나쁜 거래도 하지 않은 옳은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지속적인 ‘연애편지’ 교환을 통해 북한 도발을 막는 효과를 거뒀다며 이렇게 적었다. “트럼프 임기 말까지 북한은 핵실험도, 장거리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았다. 미국을 안전하게 지킨 중요한 성과였다.” 극과 극을 널뛰듯 오간 트럼프식 대북 접근법은 전례 없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일시적 책략의 승리였을지는 모르나 북한에 시간만 벌어준 것은 아닌가. 트럼프가 떠난 뒤 곧바로 드러난 사실은 북한이 더욱 위험해지고 미국도 한층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여지없이 북핵을 이고 살게 된 한국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은 당장 폼페이오 회고록을 꼼꼼히 검토할 것이다. 폼페이오가 ‘그렇게 재미 좀 봤다’며 드러낸 미국식 셈법, 나아가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과 비하에 김정은은 이를 갈고 있을지 모른다. 미완(未完)으로 끝난 협상의 민감한 내용까지 들춰낸 그의 기록은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실패의 자인(自認)이 아닐 수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2023-02-01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