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다는 것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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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희망이란 ‘자기실현적 예언’

독일 화가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가 그린 ‘오이빈 수도원 폐허의 고딕 창’(1828년경). 1546년 무렵 폐허가 된 오이빈 수도원을 1820년 방문한 카루스는 절망 속 희망을 발견했다. 창문은 밝은 외부를 향하도록 하고
 생명력 있는 나무를 전면에 배치했다. 그렇게 희망을 표현하되 두 개의 창문을 겹쳐 그려 희망이 가까이 있지는 않음을 은유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홈페이지
독일 화가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가 그린 ‘오이빈 수도원 폐허의 고딕 창’(1828년경). 1546년 무렵 폐허가 된 오이빈 수도원을 1820년 방문한 카루스는 절망 속 희망을 발견했다. 창문은 밝은 외부를 향하도록 하고 생명력 있는 나무를 전면에 배치했다. 그렇게 희망을 표현하되 두 개의 창문을 겹쳐 그려 희망이 가까이 있지는 않음을 은유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홈페이지
희망이란 무엇인가? 무엇인가 바라는 일이다. 왜 바라는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핍이 있기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결핍 없이는 희망이 존재할 수 없지만, 결핍에 안주하고 있어도 희망이 없다. 결핍을 느끼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때 희망이 생긴다. 이토록 오묘한 존재인 희망을 과연 시각적 대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유럽 문화사에는 미덕을 시각화하는 전통이 있기에, 미덕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기독교 전통에 나오는 일곱 가지 미덕이다.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이라는 네 가지 근본적인 미덕에다가 믿음, 희망, 자선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미덕을 더한 것이 이른바 기독교의 일곱 가지 미덕이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필립 갈레와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이 바로 그 일곱 가지 미덕 중 하나인 희망을 시각화했다. 그림 맨 아래쪽에는 ‘희망에서 오는 믿음은 달콤하다. 그 희망 없이는 우리는 인생의 그 많은 역경을 견뎌낼 수 없다(IUCUNDISSIMA EST SPEI PERVASIO, ET VITAE IMPRIMIS NECESSARIA, INTER TOT AERUMNAS PENEQ INTOLERABILES)’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 역경 속에서 희망이 없다면 모두 포기하고 말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역경을 전제로 한다. 필립 갈레와 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장 죽을 지경이다. 괴물이 창궐하는 험난한 바다에서 배는 전복되고, 육지의 집은 불타고 있는데, 사람들은 허겁지겁 도망치거나 수갑에 매인 상태에 있다. 그림 한가운데 예외적인 인물이 한 명 있다. 이 역경과 격랑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이 한 명 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까? 그녀는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닻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희망이라는 닻이 굳건하다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녀는 어떤 종류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까. 농사에 사용되는 낫과 삽을 들고 있고, 벌통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보아, 풍작을 바라는 농부의 희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설치된 로버트 인디애나의 ‘희망’. 위키피디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설치된 로버트 인디애나의 ‘희망’. 위키피디아
이 작품이 판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일반 회화보다 훨씬 많은 수가 유통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유통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역경은 보편적이고, 사람들은 역경에서 버티기 위해 희망을 보고 싶어 했으리라. 희망이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공적인’ 주제였던 것이다. 이런 희망의 공적 성격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미국의 팝아트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희망’이다.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일종의 공공예술이다. 드넓은 광장에서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끔 직관적인 형상을 담고 있다. ‘H.O.P.E.’ 영어 단어 하나만 알아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관객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희망은 실로 공공예술에 적합하다. 희망은 집단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기에. 중국 작가 루쉰은 단편 ‘고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 할 것도 없고, 없다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도 같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곧 길이 생겨난다.” 그렇다. 희망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때 비로소 생겨난다. 사람들이 희망을 갖지 않는 순간, 희망은 사라진다.

희망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즉,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고 예측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했는데,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그렇게 기대한 이가 그 기대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곧 건강해지리라고 기대하고 예측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기대한 자신이 바로 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진 사람에 의해 현실이 된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그 희망은 거대한 사회적 현실이 된다.

16세기 네덜란드 판화가 필립 갈레와 화가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 ‘희망’. 작품 아래에는 ‘희망에서 오는 믿음은 
달콤하다. 그 희망 없이는 우리는 인생의 그 많은 역경을 견뎌낼 수 없다’고 쓰여 있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홈페이지
16세기 네덜란드 판화가 필립 갈레와 화가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 ‘희망’. 작품 아래에는 ‘희망에서 오는 믿음은 달콤하다. 그 희망 없이는 우리는 인생의 그 많은 역경을 견뎌낼 수 없다’고 쓰여 있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홈페이지
모든 희망이 집단적인 것은 아니다. 독일의 화가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가 1828년경에 그린 작품 ‘오이빈 수도원 폐허의 고딕 창’을 보라. 독일 오이빈 수도원은 1369년에 세워졌으나 1546년경에 이미 폐허가 되었다. 카루스는 1820년 8월에 이 폐허를 방문한 뒤, 1828년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폐허 속에서도 죽지 않은 나무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창문이 밝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절망이 아니라 절망 속의 희망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의 구성상 특징은 두 개의 창문을 겹쳐 그려서 깊이 있는 공간감을 창출했다는 점에 있다. 그 깊이는 희망이 존재하기는 하되, 가까이 있지는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광장에서의 희망이 집단적이라면, 폐허에서의 희망은 개인적이다. 누가 폐허를 보고 싶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는 기어이 그 폐허에 가서 저 멀리 빛나는 희망을 보고야 만다. ‘오이빈 수도원 폐허의 고딕 창’에 나타난 저 밝은 희망을 본 사람은 다름 아닌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관객이 그의 개인적인 희망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리하여 조용히 그림 앞에 서 보는 거다. 이제 관객의 위치와 화가의 위치는 같다. 그림 앞에 선 관객은 화가와 시각을 함께한다. 개인적인 희망은 홀로 성소에서 올리는 기도와도 같다. 관객은 그 그림 앞에 서서 약 200년 전 폐허에서 울려 퍼진 기도를 듣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의 본다는 것은#기독교#미덕#희망#역경#자기실현적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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