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소원을 본다는 것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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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전북 군산의 근대역사박물관 근처에 설치된 ‘소원 벽화’ 패널. 방문객들이 자신의 소원을 직접 적을 수 있다. 2011년 대만계 
미국인 캔디 창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확대돼 78개국에 ‘소원 벽화’가 설치됐다. 세계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이 뭔지 
궁금하다면 프로젝트의 웹사이트에서 둘러볼 수 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전북 군산의 근대역사박물관 근처에 설치된 ‘소원 벽화’ 패널. 방문객들이 자신의 소원을 직접 적을 수 있다. 2011년 대만계 미국인 캔디 창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확대돼 78개국에 ‘소원 벽화’가 설치됐다. 세계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이 뭔지 궁금하다면 프로젝트의 웹사이트에서 둘러볼 수 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인간은 뭔가 희망하는 동물이다. 지금 당장의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동물이다. 그 소원이 가진 동원의 힘은 굉장하다. 인간에게는 소원이 있기에,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분투한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인가 소원하는 한, 아무것도 소원하지 않는 존재와는 다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당장의 현실뿐 아니라, 그가 소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였나.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소원을 아카이빙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입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묻는다. 졸업생들에게 졸업 후 소망을 묻는다. 절에 가서는 소원을 써넣은 기와들을 눈여겨보곤 한다. 건물을 짓기 위해 신도들에게 기와를 팔고 그 수익금을 건물 축조에 사용하는 기와 불사라는 것이 있다. 기와 불사를 진행 중인 절에 가면, 신도들이 기와를 구입하고 그 위에 흰 글씨로 소원을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세요’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가족들 건강하게 해주세요’ ‘주식이 오르게 해 주세요’…. 이처럼 사람들의 소원은 끝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기와 불사 소원은 이것이다. ‘평범하게 살게 해주세요.’

전 세계적으로 소원을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죽기 전(before I die) 공공예술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2011년 어느 날, 캔디 창이라는 사람은 어머니처럼 따르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다. 새삼 자기 삶을 점검하고,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벽에다가 자신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낙서처럼 적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적으면서 벽화가 만들어졌다. 이 벽화 만들기는 하나의 운동처럼 퍼져나가, 현재 78개국에서 5000개가 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소원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물이나 행운과 관련된 소원이 많다. ‘건물주 되기’ ‘로또 당첨’ ‘좋아하는 연예인 만나기’는
 단골 소재다.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뤄내겠다는 다짐보다는 벼락같은 횡재를 원한다는 글이 더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영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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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물이나 행운과 관련된 소원이 많다. ‘건물주 되기’ ‘로또 당첨’ ‘좋아하는 연예인 만나기’는 단골 소재다.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뤄내겠다는 다짐보다는 벼락같은 횡재를 원한다는 글이 더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김영민 교수 제공
세계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 내용이 궁금하거든, 이 프로젝트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된다. 그곳에는 이 프로젝트의 시작 배경, 진행 중인 나라, 도시, 사진, 소원의 내용,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이 운동을 추진하는 이들에 따르면 각각의 벽화는 ‘반성적 삶에 대한 찬사’라고 한다.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서울, 경기 여주와 용인, 경북 포항 등지에서도 이 ‘죽기 전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내가 이 프로젝트의 벽화를 직접 본 것은 얼마 전 전북 군산에서다. 군산의 대표적 관광지인 근대역사박물관 근처에 큼직한 벽화 패널이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그곳에 자신들의 소원을 적고 있었다. 그곳에 적힌 내용이 꼭 군산 사람들의 소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군산에 들른 관광객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기록했을 수도 있다.

내가 본 벽화에 적힌 소원 내용은 압도적으로 돈에 대한 것이 많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고, 사랑을 이루고, 만주에 가고 싶다는 인상적인 소원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역시 돈에 대한 소원이었다. “억만장자” “돈 벼락 맞기” “이재용 아들 되기” “이재용 아들이랑 결혼” “건물주” “로또 당첨” “서울 Top 3 아파트 사기” “buy my own luxury Seoul house(호화로운 서울 집 사기)” 등.

이러한 구체적인 소원 내용은 꽤 흥미롭다. 그냥 돈을 원하는 게 아니다. 많은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원한다. 그리고 그 돈을 벌겠다는 소망보다는 횡재를 하겠다는 열망이 강하다. 부유하기로 소문난 대기업 회장만큼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 회장이 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 회장의 며느리나 아들이 되겠다는 거다. 자수성가하기는 어렵고 결국 물려받아야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평생 월급을 저축해봐야 ‘고급’ 아파트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엄격히 말하면, 이 소원들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들이다. 즉 자기 의지와는 대체로 무관하다. 어떤 점에서 이 벽화가 반성적 삶에 대한 찬사가 되는 것일까. 벽에 큰 글씨로 적었다는 것은 그 소원이 순간 스쳐간 생각이라기보다는 평소에 하던 생각일 가능성이 크다. 농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충동적인 농담이 아니라 숙고된 농담일 가능성이 있다.

내용이 무엇이든, 소원을 공공연하게 적은 사람들은 나와는 상당히 다른 사람들 같다. 나는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고, 그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할 생각도 없으며, 만주 여행도 현시점에서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게도 소원이 있다. 나는 내 소원을 공공연하게 벽에 적을 수 없다. 그러지 말고 소원을 말해 보라고? 소원을 떠올리는 순간, 난 눈물이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소원#소원 벽화#죽기 전(before i die) 공공예술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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