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튜브]국경 없는 예술, 정치에 묶지 말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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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 노래책에 수록된 애국가요 ‘나는 헌신했노라’. 브람스는 교향곡 1번에서 이 노래와 닮은 선율을 사용한 데 이어 4년 뒤 ‘대학 축전 서곡’에서 ‘나는 헌신했노라’ 선율을 직접 인용했다. 동아일보DB
19세기 독일 노래책에 수록된 애국가요 ‘나는 헌신했노라’. 브람스는 교향곡 1번에서 이 노래와 닮은 선율을 사용한 데 이어 4년 뒤 ‘대학 축전 서곡’에서 ‘나는 헌신했노라’ 선율을 직접 인용했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2022 서울스프링페스티벌 다섯째 날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을 비롯한 다섯 현악 연주자들이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보케리니(1743∼1805)의 현악5중주 ‘마드리드 거리의 밤 음악’을 연주한다. 이탈리아 작곡가가 왜 마드리드를 소재로 한 스페인풍 음악을 썼을까.

보케리니는 18세 때 스페인 왕족의 눈에 들어 마드리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궁정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어느 날 왕이 새로 작곡한 작품 일부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바꾸어 보라고 말했다. 보케리니는 왕이 지적한 부분을 두 배로 늘려 버렸다. 결과는 당연히 파직이었다.

이후 보케리니는 프로이센으로 가서 음악 애호가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섬겼다. 왕이 죽은 뒤 보케리니는 돌아갔다. 이탈리아가 아닌 마드리드로. 그가 알던 왕족과 귀족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보케리니는 빈곤에 시달렸지만 그는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스페인에서 생을 마쳤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예술가들은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존재였다. 특히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가 강성해지자 음악가들은 그 수도인 빈으로 모여들었다.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30세 때 빈에 정착한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브람스가 빈에 도착한 3년 뒤 내놓은 교향곡 1번(1876년) 4악장에는 느릿하고 장엄한 코랄(찬송가풍) 선율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멜로디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 선율과 닮았다”고 했지만 브람스는 ”그런 소리는 바보도 할 수 있다“고 일축했다.

실제 이 선율과 닮은 노래는 따로 있었다. 브람스가 4년 뒤 쓴 ‘대학 축전 서곡’에 원곡 그대로 인용한 19세기 독일 학생가 ‘우리는 굳건한 집을 세웠다’다. 1980년대 국내 중고교 음악 교과서에 ‘어여쁜 장미’라는 제목으로 실린 곡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이 노래에 다른 가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문헌학자 한스 마스만은 1820년 이 선율에 ‘나는 헌신했노라’라는 가사를 붙였고 이 노래는 독일 애국가요로 애창됐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 마음과 손을 다해 헌신했노라. 사랑과 삶으로 가득한 내 조국 독일이여.”

이 선율과 브람스 교향곡 1번 코랄 선율이 똑같지는 않지만 두 선율은 실제 매우 닮았다. 왜 브람스는 첫 교향곡에 애국가요와 닮은 선율을 썼고 4년 뒤 그 애국가요를 원곡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넣었을까.

브람스가 빈으로 건너온 3년 뒤 함부르크가 속한 북독일연방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에서 이긴 북독일연방과 그 맹주인 프로이센의 주도로 1871년 독일제국이 수립됐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수치심에 떨었지만 독일인들은 유럽의 새 강국으로 등장한 조국을 자랑스러워했다. 추측일 뿐이지만, 브람스는 교향곡 1번에서 독일인으로서의 희망과 애국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활동하는 그가 ‘나는 헌신하노라’ 선율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화해했고 1879년 두 나라는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브람스가 ‘나는 헌신하노라’ 선율을 대학 축전 서곡에 직접 인용한 것은 두 나라의 적대감이 사라진 그 다음 해였다.

예술가들은 오래전부터 국경을 넘나드는 존재였다. 자신의 조국이 자기가 현재 활동하는 나라와 적이 되는 것은 자신의 뜻으로 좌우할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의 푸틴 정권과 밀착해 이득을 보거나, 그의 범죄적 계획을 지지 찬동한 예술가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례지만, 유럽 일부에서 러시아 예술가들이 단지 국적 때문에 불이익을 겪었다는 얘기들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 나오는 일화, 6·25전쟁 중 한밤중에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얼굴에 전짓불을 비추며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물은 뒤 즉결처분을 하곤 했다는 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특정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너는 어느 편이냐’라는 추궁을 받거나 예술적 활동에 족쇄가 가해지는 일은 온당하지 않다. 당연한 얘기도 거듭 확인해야 하는 서글픈 시대가 되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국경 없는 예술#정치#서울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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