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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웃는 남자, 웃지 못하는 여자[이은화의 미술시간]〈206〉

이은화 미술평론가
입력 2022-03-17 03:00업데이트 2022-03-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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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딧 레이스터르 ‘즐거운 술꾼’, 1629년.


인생은 힘들면 힘들수록 웃음이 필요하다. 빅토르 위고가 한 말이다. 위고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화가 유딧 레이스터르도 같은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녀가 20세 때 그린 그림에는 웃는 남자가 등장한다. 웃는 초상화가 드물던 시절, 그녀는 왜 웃는 남자를 그린 걸까?

레이스터르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활동했던 여성 화가다. 하를럼 양조업자의 여덟째 자녀였으나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가족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뛰어난 재능으로 19세 때부터 주목받았고, 24세 때 여성 최초로 하를럼 화가조합에 등록해 전문화가로 활동했다. 이 그림은 레이스터르가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서명한 작품 중 하나다. 긴 털이 달린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남자는 당시 인기 있던 희극 속 어릿광대다. 광대는 원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웃을 뿐 스스로는 웃지 않는다. 얼굴은 웃지만 그의 마음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힘들 때 가장 손쉽게 위로를 얻는 방법은 술일 테다. 빈 술병을 든 남자는 이미 거나하게 취했는지 양 볼과 코가 빨갛다. 술이 다 떨어졌다는 건 쇼가 끝났다는 의미다.

여성에겐 정규 미술교육도 전문 직업도 허락되지 않던 시대, 레이스터르는 남성 일색의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그림 고객을 얻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했을 테다. 그 삶이 녹록지 않았을 건 짐작하고도 남는다. 젊은 여성 화가가 술 취해 웃는 광대를 그린 건, 술에 위안받으며 공개적으로 웃을 수 있는 광대의 삶이 오히려 부러웠기 때문은 아닐까.

이 그림은 같은 도시에서 활동했던 거장 프란스 할스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할스만큼 성공하기를 꿈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혼 후 다섯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사후에는 이름도 완전히 잊혔다. 심지어 그녀가 남긴 뛰어난 작품들은 19세기 말까지 할스의 그림으로 오인되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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