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공포 없는 일본이 웃을 수 없는 이유[특파원칼럼/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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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만 생활하면 싼 물가에 만족할 수도
임금 30년 정체, 해외 가면 높은 물가 충격

박형준 특파원
박형준 특파원
2019년 1월 일본 도쿄에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집 앞 주유소는 휘발유를 L당 134엔(약 1400원)에 팔았다. 최근 다시 확인해 보니 164엔으로 올랐다. 고공 행진하는 유가 충격을 일본도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다.

유가가 오르면 플라스틱 제품 가격도 덩달아 오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보복 소비’란 단어가 나올 정도로 소비도 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자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0월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3.2%, 미국은 6.2% 급등해 인플레이션 공포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9월 소비자물가는 0.2% 상승에 그쳤다. 8월(―0.4%), 7월(―0.3%)은 오히려 떨어졌다. 어찌된 일일까.

최근 저녁 모임에서 자동차용 부품을 생산하는 일본 중소기업 사장 A 씨의 고민을 들으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는 “원자재 값이 올라도 부품 값에 반영할 수 없다. 부품 값을 올리면 다음 계약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업 이윤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기업들도 A 씨처럼 행동하면 최종 소비재 가격은 오르지 않고, 소비자물가도 낮게 유지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안도하는 모습이다. 마트에 가면 어제 가격표가 오늘도 동일하게 붙어 있다. 전자 제품은 오히려 값이 싸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 살 것을 내일로 미루면 이득을 보게 된다. 5000원이면 식사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체인 음식점이 널렸고, 5만 원이면 비즈니스호텔에서 숙박할 수도 있다. 기계화하고, 서비스를 규격화해 가격을 낮추는 체인형 기업들의 등장도 물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같은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기만 할까.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7월 발표한 맥도널드의 빅맥 가격은 스위스 7.04달러, 미국 5.65달러, 한국 4달러, 일본 3.55달러였다. 57개 조사 대상국 중 일본 빅맥 가격은 31번째로 중간보다 아래였다. 자유로운 물류 이동으로 햄버거의 원재료비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 차이는 인건비에서 결정된다. 즉, 일본은 인건비가 낮아 햄버거 가격을 낮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물가 수준을 반영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지난해 일본의 연평균 임금은 3만9000달러다. 1990년부터 30년 동안 불과 4%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은 48%, OECD 평균은 33% 올랐다.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개인이 소비를 늘리기 힘들다. 개인이 소비를 하지 않으니 기업은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없다. 기업 이윤이 늘지 않는데 근로자 임금을 올려주기 힘들다. 악순환이다.

개인소비는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다 보니 국가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일본의 GDP도 늘지 않았다. 1990년 이후 30년간 미국 GDP는 3.5배로, 중국은 37배로 커졌지만, 일본은 1.5배로 성장하는 데 그쳤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일본이 세계 3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주는 것도 시간문제다.

코로나19 백신이 보급되면서 차츰 해외여행이 늘고 있다. 일본인들도 거의 2년 만에 해외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일본 내 싼 물가와 달리 해외에선 물가가 크게 올랐다. 저성장, 저물가로 인해 어느새 일본인들이 가난해져 버렸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특파원칼럼#일본#인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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