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몸 낮추면 삶 풍요로워져” 정상 오른 이의 인생 내공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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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영국 법원에 취재를 나가 흥미로운 사건의 피고, 원고, 변호사의 사진을 찍어 오란다. 법정에서 쓰는 영어는 너무 어려워 도대체 무슨 사건인지 파악이 안 된다. 방법은 현장에 있는 다른 회사 기자들에게 물어보는 것뿐.

레드카펫, 시상식에 참석한 연예인의 사진을 찍을 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가 누군지 당최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건 또다시 타사 기자에게 물어보기. 바쁜 데다 서로 경쟁 중인 기자들이 순순히 설명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다. 항상 웃으며 커피나 차, 비스킷을 건네고 저녁에는 틈틈이 맥주도 샀다. 영국 언론사 견습사원에서 게티이미지 유럽지사 수석 사진가를 거쳐 마이클 잭슨, 스팅, 에마 스톤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촬영한 MJ KIM(본명 김명중·49)의 이야기다. 그는 2008년부터 폴 매카트니(79)의 전속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다.

그는 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 때도 웃으며 환한 기운을 뿜어낸다. 밝은 표정은 누군가에게 늘 물어봐야 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에 생겼다고 한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을 하려면 몸을 낮춰야만 했다. 돌아보니 그게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됐고, 영국 내무부가 그에게 노동허가서 발급을 불허하자 50명도 넘는 이들이 항의 편지를 써서 결국 내무부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등 고비마다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 그와 친한 영국 사진 기자들이 매카트니 소속사 직원들에게 “MJ가 그 자리에 간 게 정말 잘됐다”며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한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빈도나 기간에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을’이 되는 경험을 한다. 꼭 업무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상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게 ‘을’이 되는 순간이다. 고개를 숙이는 건 쉽지 않다. 다만 스스로를 낮출 때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정상의 자리에 오른 이도 마찬가지다. 조니 뎁은 사진 촬영을 할 때 “MJ,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만 해.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라고 했다. 이 말은 온 마음을 다해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조니 뎁이 멋진 사진을 갖게 됐음은 물론이다.

800곡이 넘는 노래를 만든 매카트니는 콘서트를 할 때 곡을 고르는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연에 온 관객들이 정말 즐겁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시간을 갖고 돌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보다는 그들이 듣고 싶은 노래는 무엇일까를 염두에 두고 곡을 선정합니다.”

가수들 중에는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 위주로 콘서트 프로그램을 구성해 팬들이 아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매카트니는 자기가 원하는 노래만 불러도 뭐랄 사람이 없지만 이 세계적인 거장은 철저히 낮은 자세로 관객을 대한다.

허리를 굽혀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주문처럼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내 인생이 조금 더 윤택해지고 있는 중이라고.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미소#환한 기운#정상#인생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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