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협업[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1-08-04 03:00수정 2021-08-04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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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론 하워드 감독의 ‘아폴로 13’
이정향 영화감독
1970년 4월. 우주 비행사 짐 러벨의 팀은 아폴로 14호에 탑승할 순번이었으나 13호 승무원들에게 문제가 생겨 대신 13호의 주인공이 된다. 서양인들이 꺼리는 숫자인 13호에다 발사 시각 또한 13시 13분이기에 불길하다는 우려가 많았는데 발사 이틀 전, 팀원들이 홍역에 걸린 자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홍역 항체가 없는 켄이 팀에서 탈락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 켄 없이 달에 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켄을 고집할 경우 팀원 모두 탑승이 취소되기에 선장 짐은 켄을 포기한다. 이륙 이틀 뒤인 4월 13일에는 산소탱크에서 폭발까지 일어나 우주선은 위기에 처한다.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희박해진 채 나흘을 견디는 중, 홍역이 발병할까봐 지구에 남겨진 켄이 동료들을 지구로 귀환시킬 방법을 각고의 노력 끝에 찾아낸다.

백수 시절에 이 영화를 봤다. 비디오 가게에 붙은 포스터를 눈독 들였다가 너덜너덜해질 무렵 얻어왔다. 서른을 넘긴 나이, 감독 데뷔는 할 수 있을지, 이대로 늙어갈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시절, 내 인생의 패만 유독 불리하게 여겨져 침울하던 때였다. “전쟁터에서 밤에 비상착륙을 해야 하는데 과부하로 계기판의 불까지 꺼졌다. 고도도 알 수 없어 위험했는데 저 아래에 녹색의 빛이 보였다. 바닷가로 떠밀려 온 해조류가 빛을 내며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가며 무사히 착륙했다. 기체가 정전이 되지 않았다면 그 빛은 보이지 않았을 거다.” 공군 조종사였던 짐 러벨의 인터뷰다.

맨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했을 때 이 영화를 만났고, 힘을 내 다시 시나리오를 썼다. 남들이 혹평을 해도 누군가는 나의 영화를 기다릴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외로웠지만 이 시기가 득이 될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 당시 취미로 한 해의 신수를 봐주는 선배가 있었는데, 매년 희망도 절망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말뿐이었다. 그러다 데뷔하자 지난 몇 년간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운세였다고 말을 바꿨다. 황당했다. 미리 알았다면 맘 편히 세월이 지나길 기다렸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기회가 왔을 때 빈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전작들 세 편의 시나리오는 이때 나왔다.

신은 한쪽 문을 닫을 때 다른 쪽 문을 열어두는데, 인간들은 닫힌 문만 바라보느라 미처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켄이 팀에서 배제되지 않고 탑승했다면? 아찔하다. 그를 지구에 남겨둔 신의 의도를 모른 채 틀어진 상황에 좌절하고 원망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러는 대신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전기도, 산소도 바닥난 우주선 안에서 세 명이 벌이는 필사의 노력과, 관제센터와 켄의 분투가 신의 계획을 멋지게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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