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박형준]日 백신 ‘접종권’ 미스터리

박형준 도쿄 특파원 입력 2021-06-22 03:00수정 2021-06-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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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때부터 전국 시스템 만들었다면
행정력 낭비시키는 접종권 필요 없어
박형준 도쿄 특파원
40대 후반인 기자는 일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조기에 접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일본은 백신 접종이 느린 데다 기자의 순번도 후순위이기 때문이다. 의료종사자, 65세 이상 고령자,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 등을 접종한 뒤 나머지 일반인 순서가 돌아온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일본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도쿄의 대규모 접종센터에 예약이 대거 미달되자 17일부터 연령제한 없이 누구나 접종할 수 있게 됐다. 기자도 당장 인터넷으로 예약을 시도했지만 ‘접종권 번호’를 입력해야 해 포기했다. 각 지자체는 백신 접종권을 만들어 우편으로 발송하는데 기자에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기자가 사는 도쿄 시나가와구는 조기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구청으로 찾아오면 접종권을 현장에서 나눠줬다. ‘운이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18일 오전 시나가와 구청을 찾았다. 하지만 구청 주차장을 뱀처럼 빙글빙글 둘러싼 긴 대기 줄을 보고 절망했다. 기자가 받은 접수번호는 608번. 안내하던 구청 직원은 “오늘 안에 접종권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니, 왜 접종권이 필요할까….’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 식별번호가 일본에서는 보편화돼 있지 않은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일본에도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마이넘버’가 있지만,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개인정보가 마이넘버에 집중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현재 ‘마이넘버 카드’를 소지한 일본인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다. 각 지자체는 접종 이력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접종권을 만들었다. 접종권 번호가 곧 마이넘버인 셈인데, 지자체는 그걸 통해 예약을 받고, 접종 이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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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있다. 지자체 시스템은 서로 연동이 안 되기 때문에 정부가 전국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지난해 초 지자체들로부터 코로나19 감염자 수를 팩스로 받아 집계했던 것처럼 백신 접종 현황도 그렇게 파악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접종기록시스템(VRS)을 개발해 4월에 공개했다. 접종권 번호, 마이넘버, 이름,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를 모두 지자체에서 받아 연동시켰다. 접종 예약은 지자체별로 파악되지만 접종 완료 실적은 정부가 전국 규모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지자체가 VRS 탑재 단말기로 일일이 접종권의 바코드를 스캔해 접종 사실을 입력해야 하는 과외 일이 생기긴 하지만.

일본 정부는 왜 예약 단계부터 전국 단위의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을까. 비상 상황임을 호소해 마이넘버를 통해 인터넷 예약을 하게 했다면 정부는 예약 단계부터 전국적인 관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접종권은 필요 없기 때문에 행정력 낭비도 막을 수 있다. 백신을 담당하는 고바야시 후미아키(小林史明) 내각부 보좌관은 최근 온라인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드 저팬’과의 인터뷰에서 “1월 백신 프로젝트팀이 세워졌을 때 이미 지자체가 백신 예약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즉, 정부가 미리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9월 1일 디지털 정책을 총괄하는 디지털청을 출범시킨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의 핵심 정책 중 하나다. 하지만 중후장대한 디지털청 신설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현안인 백신 접종 시스템부터 개선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오늘도 많은 시민들이 몇 시간씩 구청에서 줄을 서 접종권을 배포받고 있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일본#백신#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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