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길진균]국정원의 19번째 ‘이름 없는 별’

길진균 정치부장 입력 2021-06-05 03:00수정 2021-06-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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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격해진 총성 없는 정보전쟁
文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별’ 추가
길진균 정치부장
1996년 10월 1일 밤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루스카야 거리 55번지 A아파트. 비명이 들렸다. 그 직후 아파트 3층 복도에서 둔기에 뒷머리를 맞고 숨진 남성이 발견됐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소속 최덕근 영사였다. 러시아인 목격자는 경찰에서 “아파트 안쪽에 2, 3명의 괴한이 서성거렸다. 그(최 영사)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간 후 얼마 안 있어 비명이 들렸다”고 진술했다.

최 영사는 당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북한의 위조지폐인 일명 ‘슈퍼노트’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을 인도받은 한국 정부의 부검 결과 최 영사의 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독약 성분이 검출됐다. 북한 공작기관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 영사는 ‘이름 없는 별’로 남았다. 국정원 중앙 현관으로 들어서면 검은색 돌판 위에 별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조형물과 마주한다. 돌판 아래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란 글이 적혀 있다. 임무 수행 중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는 물론이고 이름도 공개되지 않는다. 숨진 시기나 과정이 알려지면 비밀리에 수행한 임무가 상대국이나 적에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로 외교관 신분을 갖는 ‘화이트’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던 최 영사의 순직은 이후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이름 없는 별’ 중 유일하게 그 내용이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국정원을 방문했다. 취임 후 두 번째다. 10일이면 창설 60주년을 맞는 국정원의 새 원훈석 제막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도 ‘이름 없는 별’ 앞에서 묵념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 3년 전 18개가 새겨져 있던 검정 돌판 위 별이 19개로 늘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지난해 내부 심사를 거쳐 별을 추가했다”며 “구체적인 임무나 사망 시기를 밝힐 수는 없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순직한 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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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내부에선 “우리는 사이버에서 일하고 우주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회자되고 있다. 1961년 6월 10일 김종필(JP)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했을 때 만들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원훈을 각색한 것이지만 과거와 달라진 국정원의 역할을 보여주는 비공식 원훈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국정원은 산업기밀 유출 방지, 사이버 공격 대응, 국제범죄, 우주정보 등 과거와는 달라진 형태로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상당수 전장이 사이버 세계로 이동했지만 그렇다고 비밀 요원의 활동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대북 첩보 수집뿐만 아니라 초국가적으로 움직이는 산업스파이, 테러 및 납치 대응 등 국내와 해외 곳곳에서 치러지는 소리 없는 전투는 더욱 격해지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름 없는 별’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새겨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방문 때 6·25전쟁 참전용사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 곁에서 무릎을 굽혔고, 이는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 됐다. 다만 우리 곁에도 국익을 위한 헌신이라는 명예만 갖고 이름 없이 사라진 영웅이 적지 않다는 것도 되새겼으면 한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국정원#이름 없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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