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굴욕이 무릎을 꺾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손효림 문화부 차장 입력 2021-05-03 03:00수정 2021-05-0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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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저기…, 무슨 역할을 맡은 누구시죠?”

1998년 드라마 ‘대왕의 길’ 제작 발표회에서 그는 이 질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앳돼 보이는 기자가 낯설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이 완전히 잊혀졌구나!’ 그는 탄식했다. 주연 배우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 위치가 이렇구나.’ 처절하게 깨달았다.

꼭 10년 전 미스코리아 진으로 화려하게 데뷔해 곧장 영화 주연, 유명 예능 MC 자리를 꿰찼지만 활동이 줄며 잊혀진 것.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도 치솟았다. 다른 배우가 거절한 역도, 단 두 장면 나오는 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드라마, 영화는 물론 광고계에서 숱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배우 김성령(54)의 이야기다.

사람들 대부분은 살면서 굴욕을 겪는다. 윤여정(74)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부담스럽다는 시청자들의 비판을 견디고, 잠깐의 촬영을 위해 수 시간 대기해야 하는 단역도 꿋꿋이 맡았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지금 이 순간은 그냥 온 게 아니란 걸 모두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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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의 자리에 오른 다른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르지 않다. 뮤지컬계에서 ‘핫지상’으로 불리는 배우 한지상(39)은 데뷔 초 사전 통보도 없이 두 달 치 스케줄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을 겪었다. 2005년 뮤지컬 ‘그리스’에서 조정석의 커버를 맡던 때였다. 커버는 해당 배우가 무대에 서지 못할 경우 대신하는 역할이다. 어느 날 새벽 인터넷으로 스케줄표를 보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삭제된 걸 확인했다. 연습 때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숱하게 혼나는 신인이었지만 단 한마디 공지도 없이 스케줄에서 빼버리자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제 이름이 없어졌어요.” 하지만 그는 매일 공연장에 가 꼼꼼하게 모니터링하고 없어진 역할이지만 커버 연습도 계속했다. 그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의 기억이 꾸준히 노력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이승우 소설가(62)도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은 물론 온몸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다. 헌책방에서 자신이 인사말을 쓰고 서명한 첫 책을 발견한 것. 그는 “정말 소중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 몇 분에게만 감사의 말을 써서 드렸다. 그렇게 드린 책이 진짜 몇 권 안 되는데 그걸 헌책방에서 본 순간 참담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분은 그렇게 받는 책이 너무 많았을 거라고 이해하게 됐지만 마음이 아팠던 기억은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꾸준히 글쓰기를 이어갔고 국내는 물론 해외, 특히 프랑스에서 큰 사랑을 받는 작가로 우뚝 섰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대로 주저앉을지, 털고 일어나 나아갈지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렸다. 그 결과가 모두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다만 이를 후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부 역시 자신에게 달렸음을, 많은 이들이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준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대왕의길#김성령#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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