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153〉봄의 도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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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셰르베크 ‘회복기’, 1888년.
헬렌 셰르베크 ‘회복기’, 1888년.
푸른 눈의 아이가 버들가지로 엮은 커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손에 쥔 머그컵 안에는 새순 돋은 나뭇가지 하나가 꽂혀 있다. 아이의 몸은 하얀 이불 천으로 감싸져 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다.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걸까. 제목을 보니 아이는 지금 병에서 회복 중이다.

이 그림을 그린 헬렌 셰르베크는 19세기 핀란드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뛰어난 재능 덕에 열한 살에 장학금을 받고 핀란드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정식으로 미술을 배웠다. 이 그림은 26세 때 그린 것으로 당시 그녀는 영국 남서부의 콘월 지역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콘월은 아름다운 해변과 따뜻한 햇살로 유명해 예로부터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였다. 셰르베크는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모델은 인근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다. 짧은 머리와 짙은 색 옷 때문에 남자아이로 보이지만 실은 여자아이다. 학교 선생님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활기 넘치는 아이였지만 화가는 그림 의도에 맞게 아픈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과 나뭇가지의 새순은 봄의 상징으로, 아이가 다시 건강해질 것을 암시한다.

사실 이 그림에는 화가의 아픈 경험이 투영돼 있다. 셰르베크는 네 살 때 계단에서 넘어져 심각한 부상을 당했지만 가난 때문에 제때 치료받지 못해 불편한 다리로 살았고, 이것이 평생 콤플렉스였다. 또한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파혼의 상처에서 회복 중이었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의 상처에서 회복되고픈 화가의 의지를 담은 그림인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고 싶은 것이 어디 화가 혼자만의 바람일까. 봄의 도착과 희망을 전하는 이 그림은 제작된 그해 파리 살롱전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고, 핀란드에서 전시된 후 국립 아테네움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가난과 장애, 사랑의 상처를 묵묵히 견뎌낸 화가에겐 봄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테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봄의 도착#헬렌 셰르베크#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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