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생각[이준식의 한시 한 수]〈91〉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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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을 알리는 차가운 북소리 새벽으로 향해 갈 때/맑은 거울 앞에서 노쇠한 모습 비춰본다.

창 너머 댓잎은 바람에 놀란 듯 흔들리고/문을 여니 흰 눈이 온 산에 가득하다. 눈발 날리는

깊은 골목은 더없이 고요하고/눈 쌓인 너른 정원은 마냥 한갓지다.

묻노니 그대는 은자 원안(袁安)의 집안처럼/느긋하니 여태껏 사립문을 닫아두고 있을 테지.

(寒更傳曉箭, 淸鏡覽衰顔. 隔유風驚竹, 開門雪滿山. 灑空深巷靜, 積素廣庭閑. 借問袁安舍, 소然尙閉關.)

―‘겨울밤 눈을 보며 호거사를 생각하다(冬晩對雪憶胡居士家)’ 왕유(王維·701∼761)

눈 내리는 밤, 초췌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시인은 멀리 있는 친구를 떠올린다. 바람에 놀란 듯 요란하게 써걱대는 창밖의 댓잎 소리, 문을 열자 한눈에 들어오는 소복이 눈 쌓인 산, 눈발은 아직도 어지러이 휘날려 인적마저 끊어진 골목, 온통 눈으로 뒤덮여 유독 더 넓어 보이는 한갓진 정원. 시인이 맞은 어느 눈 내리는 밤은 이렇듯 그윽하고 덤덤하다. 이 무렵 친구는 어떤 겨울을 보내고 있을까. 물어보나 마나 사립문 걸어 잠근 채 느긋하니 고요와 여유를 즐기고 있을 터다. 자신의 청정(淸靜)한 심경이 그대로 친구에게도 닿아있을 거라 확신하는 시인의 도타운 우정이 눈처럼 눈부시다.

시에서 친구 호거사(胡居士)에 비유된 원안이란 인물은 세상사에 초연했던 한나라의 은자. 폭설로 사람들이 굶주리자 나라에서 양식을 배급하려는데도 그는 대문을 닫아걸고 꿈쩍하지 않았다. 행여 자기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자신은 구제받기를 사양하겠다는 거였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표상 같은 선비였다. 시인이 청빈(淸貧)했던 옛 선비를 인용한 건 예전에 그랬듯 친구가 여전히 두문불출하며 애써 가난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우려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친구#생각#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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