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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반짝이는 씨앗들아 봄을 준비하자[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63〉

신이현 작가
입력 2020-09-29 03:00업데이트 2020-09-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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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날이 서늘해지니까 괜히 기분이 설렌다.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하고 나뭇잎은 벌써 물들어 간다. 황혼은 어느 때보다 붉고 밤하늘의 달은 눈이 부시다. 붓꽃은 까만 씨앗을 수북하게 쏟아내고 장미꽃은 올해의 마지막 송이를 피워내느라 애를 쓴다. 눈이 가는 곳 어디라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너 참 아름답구나!

복숭아 농사짓는 이웃 후배는 복숭아 끝났다고 만세를 부른다. 지난겨울 가지치기부터 지금까지 복숭아나무 붙들고 애먹었다. 그는 이제 휴식이지만 동네 앞 들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고 그 옆 사과밭은 막 붉은색이 오른다. 누구는 끝났지만 누구는 아직 한참 더 보초를 서야 한다. 우리 집 농부 레돔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보초를 선다. 머릿속엔 올가을 포도밭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올해도 작년처럼 포도밭 고랑에 호밀이랑 보리 씨앗을 뿌려야겠어. 최고의 퇴비였어! 그리고 토끼풀도 좀 많이 필요해. 작년에 뿌린 것들이 많이 못 올라왔어. 유채꽃 씨는 뿌리면 겨울에 얼어 죽겠지? 그렇지만 무는 괜찮을 거야. 뿌리가 길쭉하고 껍질 색이 검은 품종의 무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건 없겠지? 약 처리 안 된 순수한 씨앗이어야 해. 아, 좋은 씨앗을 많이 구하고 싶다. 또록또록 귀엽고 반짝이는 씨앗!”

찬바람이 불기 무섭게 시작되는 씨앗 타령, 나에겐 제일 듣기 괴로운 노래다. 윤이 나는 오동통한 씨앗, 소독이 안 된 씨앗, 한국 전통 씨앗, 키가 큰 호밀, 키가 작은 보리, 참 까다롭기도 하다. 이번에는 작년에 없던 무 씨앗까지 구해 달라고 한다. 1년에 우리가 무를 얼마나 먹는다고 무 농사까지 지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사람 먹을 용도가 아니라고 한다.

“길쭉한 무는 땅에 정말 좋아. 깊숙하게 파고들어 가기 때문에 땅에 구멍을 내어 땅이 숨을 쉬게 하지. 그것이 땅속에서 썩으면 지렁이들이 오고, 온갖 벌레와 박테리아들도 살게 돼. 그 자체가 미네랄이 돼. 그러면 땅이 좋아서 춤을 출 거야. 땅이 춤을 추면 거기서 자라는 포도나무도 춤을 추고, 거기에 열린 포도도 춤을 추겠지. 그 포도로 담근 와인을 마시면 사람도 춤을 추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람만 동치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여름 미친 폭풍우에 나무뿌리들이 다 녹아내리는, 마음 졸이는 시간들을 벌써 잊었나 보다. 파종의 시간이 오니까 오직 씨를 뿌리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인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씨앗을 구해달라고 하면 막막했는데 농사 3년 차가 되니까 그가 구해달라면 어떻게든 착착 찾아낸다. 그러니까 레돔은 참 복도 많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고 싶은 대로 짓게 놔두지. 사달라는 건 다 사주지. 벌레들이 다 파먹어서 수확량이 쪼그라들어도 별 잔소리도 하지 않지. 이런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씨앗을 구해주며 깨알 잔소리를 하지만 그는 듣지도 않는다. “올해 호밀은 정말 알차다. 또록또록하다!”

씨앗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 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올가을에는 텃밭의 뿌리 작물들을 모두 포도밭으로 옮기려고 한다. 루바브와 로즈메리, 쐐기풀, 딸기, 톱풀, 옮겨 심어야 할 뿌리들이 줄을 서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냥 보이는 것일 뿐이다. 모든 열매들은 자신의 후세를 남기기 위해 씨앗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뿌리들은 또 다른 뿌리를 불려놓았다. 가을에 이미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엔 작은 풀들의 뿌리를 옮기기에 좋은 때다.

레돔은 애지중지하는 루바브 뿌리를 잘라 포대에 넣고 걸어간다. 이웃이 묻는다. “레돔 씨 어디 가세요?” 그는 딴생각에 빠져 대답할 겨를도 없다. 가을의 농부 모습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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