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왜곡된 군함도 홍보… ‘007 영화 촬영지’로만 아는 일본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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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아베 총리, 자부심과 애국심 강조
정부 주장 홍보하는 역사관·전시관… 전쟁 전시실 30%만 가해 행위 전시
日 젊은 세대, 과거사에 점차 둔감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영토·주권전시관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대형 지도(왼쪽 사진),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라 이름 붙인 독도 모형 등을 통해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도쿄 신주쿠구 산업유산정보센터 내 대형 스크린은 군함도를 설명하면서 징용 노동자의 가혹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오른쪽 사진).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영토·주권전시관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대형 지도(왼쪽 사진),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라 이름 붙인 독도 모형 등을 통해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도쿄 신주쿠구 산업유산정보센터 내 대형 스크린은 군함도를 설명하면서 징용 노동자의 가혹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오른쪽 사진).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
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일본 역사 중 일본 영토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1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영토·주권전시관을 찾았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이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보였다. ‘일본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조선, 대만 등을 포기했지만 독도와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포기한 건 아니다’라는 일본의 억지 주장 역시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천장에는 독도, 쿠릴열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영토분쟁 지역이 모두 일본 땅으로 표시된 지도가 있었다.

즉 이 전시관은 일본이 줄곧 일방적으로 주장해 온 영토 관련 내용이 총망라된 곳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영토 문제의 시발점으로만 묘사했고, 전시관 내부에서는 패전이란 단어를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06년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과거사 문제로 자괴감을 갖지 말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갖자”고 주장했다. 전범국, 패전국이라는 기존의 ‘자학(自虐)사관’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일본 정치인 중 우익 성향이 유달리 강한 그가 2012년 12월 재집권한 지 8년이 지나면서 이런 철학이 일본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가해(加害) 역사가 점점 왜곡되고 사라지고 있음이 뚜렷하다.

○ 보여주고픈 내용만 전시
지난달 14일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별관에 위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방문했다. 일본은 나가사키현 군함도, 후쿠오카현 미이케 탄광과 야하타 제철소 등 근대화를 이끈 23개 산업유산을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 센터는 23개 산업유산을 널리 홍보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안에 들어서자 65인치 TV 화면 7개를 붙여 만든 대형 화면이 보였다. 화면에는 조선인 강제노역의 현장으로 유명한 군함도를 소개하고 있었다. ‘1891년부터 석탄을 캐기 시작했고 석탄의 품질이 매우 높았다’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전시실 두 곳을 지나자 한쪽 벽면을 옛 군함도 주민들의 얼굴로 채운 공간이 있었다. TV에선 그들의 증언이 흘러나왔다. “조선인이 채찍을 맞은 건 아니다.” “(대만인이었지만) 급여를 정확히 받았다.” 조선 출신 광부를 우대했다는 옛날 기사, 대만 노동자가 받았다는 월급봉투 등도 전시됐다.

군함도의 조선인 노동자가 상상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이런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유네스코가 ‘산업유산의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했음에도 침략 역사는 싹 없애버린 채, 일본에 유리한 내용만 집중 홍보한 것이다.

2013년 10월 취재차 군함도를 찾았을 때 만난 여행 안내인 고바타 도모지(木場田友次·당시 75세) 씨도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함도에서 직접 석탄을 캤다는 고바타 씨는 “조선 노동자의 생활이 어땠느냐”는 당시 기자의 질문에 “지하 1km 정도 되는 가장 위험한 갱도에 조선인들이 투입됐다”고 했다. “탈출하다 죽은 조선인도 있었고, 군함도 북쪽 끝에 조선인 숙소가 있었는데 매우 열악했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그런 고바타 씨 역시 공식 안내 때는 “힘들었지만 노동자끼리 서로 돕고 살았다. 모두가 산업일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며 군함도의 긍정적인 내용만 언급했다. 7년 전의 씁쓸한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 사라지는 가해 역사
1985년 건립된 오사카인권박물관(일명 ‘리버티 오사카’)은 재일 한국인, 한센병 환자 등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아 온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료 3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과거 조선인이 일제에 당했던 핍박과 고통을 보여주는 유물도 다수 전시됐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개관한 지 35년 만인 올해 5월 31일 문을 닫았다.

폐관에는 2011년 11월∼2015년 12월 오사카 시장을 지낸 극우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51)가 깊게 관여했다. 2008년 정계 입문 당시 무소속이었으나 자민당보다 더 강경한 극우 정당 일본유신회를 창당했다. 그는 시장 재직 시절인 2012년 5월 “의견이 엇갈리는 전시물의 설명에 양론을 병기해야 한다”며 오사카인권박물관의 폐관론에 불을 지폈다. 이후 곳곳에서 폐관 주장이 불거졌고 비용 문제 등까지 겹쳐 결국 문을 닫았다.

우익의 입김은 인근의 오사카국제평화센터(일명 ‘피스 오사카’)에도 짙게 반영됐다. 이 센터는 일본에서는 드물게 조선인 노동자와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언급한 곳이다. 하지만 2014년 9월 개보수 공사를 단행하며 강제징용과 난징대학살 내용을 모두 없앴다.

기자는 개보수 공사 한 달 전인 2014년 8월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고전하던 일본군이 1937년 12월 13일 난징에 입성해 엄청난 수의 중국인을 살해했다. 수 주에 걸쳐 살해당한 시민과 포로는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는 설명문이 있었지만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전쟁 관련 전시시설 85개 중 위안부, 창씨개명, 강제노동, 난징대학살, 731부대의 인체 실험 등 일본군의 가해 행위를 상설 전시하는 곳은 26개(30.6%)에 그쳤다.

○ 박물관의 ‘손타쿠’
중앙정부 또한 이런 움직임을 배후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부과학성은 2014년 1월 교과서 검정 기준을 개정하며 ‘근현대사 사안을 기술할 때 정부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정부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교과서에 넣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 시점을 전후로 일본의 가해역사 삭제가 부쩍 늘어났다. 많은 박물관과 전시관이 정부 뜻을 헤아려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석 달 뒤 나라현 덴리시는 야마토해군 항공대 야마토 기지 유적지에 설치된 안내판을 돌연 철거했다. ‘조선인 노동자와 위안소의 여성이 강제 연행됐다’는 문구가 들어갔기 때문에 없앴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사이타마현의 사이타마평화자료관 역시 개보수 공사를 하면서 연표에서 ‘위안부’와 ‘난징’이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나가노현 나가노시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을 옮기기 위해 만들었던 지하 벙커 ‘마쓰시로 대본영’이 있다. 과거에는 전시관 입구에 “대본영 건설에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동원됐다”는 내용의 안내 간판이 있었다. 하지만 2013년 8월 시 당국은 ‘강제적으로’라는 문구를 돌연 테이프로 가렸다. 시민단체들이 비판하자 아예 ‘반드시 모두가 강제적이지는 않았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라고 설명한 새 간판을 설치했다.

○ 간토대지진 학살 조선인 추도식도 폐지 위기
1973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9월 1일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는 1923년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에 대한 추도식이 열린다. 이에 우익단체 역시 2017년부터 추도식과 동일한 시간에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종의 맞불 집회를 열고 있다.

특히 지난해 추도식 때 우익단체와 추도식 참가자들이 거세게 충돌하자 도쿄도 측은 양측 모두에게 ‘관리상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올해 추도식이 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5일 재선에 성공한 강경 우익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68) 도쿄도지사 역시 이 추도식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는 2016년 도지사로 처음 선출된 이후 역대 도지사가 보냈던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현재 추도식 실행위 측은 서약서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 추도식은 원래 조용하게 사망자를 위령하는 형태여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익들의 반발과 고이케 도지사의 성향 등을 감안할 때 언제든 추도식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당하다.

일본 젊은층 역시 과거사에 점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애초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관심을 가질 기회조차 없다. 7년 전 군함도에서 만난 일본 청년이 떠올랐다. 그는 군함도가 강제징용의 장소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맑게 웃으며 “‘007’ 영화에서 군함도를 처음 봤다”고 말하던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군함도#일본 역사 왜곡#일본 가해역사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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