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살균터널[횡설수설/이진구]

이진구 논설위원 입력 2020-06-19 03:00수정 2020-06-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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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영국을 방문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악수한 뒤 면전에서 소독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만찬 음식도 수행원들이 먼저 먹어본 뒤 먹었고, 가구와 침대는 본국에서 소독한 것을 공수해 사용했다. 차우셰스쿠가 돌아간 뒤 여왕은 제임스 캘러헌 총리를 불러 어떻게 저런 인간을 초대했느냐고 질책했는데 여왕이 총리에게 이 정도로 화를 낸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고 한다.

▷늘 암살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독재자들은 독약이나 세균, 바이러스 등에 피해망상에 가까울 정도의 노이로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인 감염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가 유행하자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은 사망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34일이나 잠적했다가 최근 나타났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봄 20일간 잠적했을 때도 코로나19 때문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1일 공장 준공식에 나타나 잠적을 끝낸 이후에도 원산과 평양 외곽 강동군에 머물렀는데 평양의 코로나19 상황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죽은 사람이 감염될 리도 없을 텐데 이런 과민반응은 사망한 ‘최고 존엄’에도 적용된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에 들어가려면 외투와 소지품을 모두 맡긴 뒤 신발 바닥 소독기와 멸균대를 지나야 한다. ‘초강력 흡입여과실’도 있는데 볼살이 일그러질 정도의 강풍이 일면서 진공청소기처럼 온몸의 먼지를 빨아들인다.


▷러시아가 17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관저와 크렘린궁에 특별 살균터널이 설치돼 있다고 밝혔다. 사람이 지나가면 천장과 벽에서 소독약이 뿌려지는데 관저와 크렘린궁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푸틴은 3월부터 크렘린궁 집무실 대신 주로 관저에 머물며 원격 시스템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고 한다. 24일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5주년 군사퍼레이드에서 단상에 함께 앉을 참전군인 80명은 푸틴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 격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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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들의 감염 노이로제는 자업자득이다. 오랜 독재로 나라가 어렵다 보니 의료체계가 부실한 데다 국민의 건강 수준도 낮아 감염병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니카라과 정부는 코로나19에 아예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고,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방역당국이 암매장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코로나19 확진자는 55만여 명, 사망자는 7000여 명이지만 과소 추계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북한은 코로나19 청정국을 자처하지만 믿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볼 필요가 없는 독재자들이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푸틴#살균터널#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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