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지 않는다면[오늘과 내일/하임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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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있지만 경제성장 주역 김우중 회장
창업주의 도전정신 이어야 새 거인 탄생

하임숙 산업1부장
하임숙 산업1부장
신기했다. 기자 10여 명이 질문을 쏟아내는데 일일이 답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신 몫의 식사를 끝내는 것 아닌가. 몇 마디 묻고 계속 듣기만 했던 나는 밥공기를 3분의 1만 비웠을 뿐이었다. 1998년 봄 전북 전주시에서 기자단과 함께했던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다.

한 대우그룹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입사하고 제일 이상했던 게 회장이 참가하는 식사 자리로, 회장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맹렬하게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이었다. 왜 그런지는 서너 번 겪어본 뒤에 알았다. 안 그러면 밥을 못 먹었다. 김 회장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김 회장이 식사를 빨리 하는 습관을 갖게 된 건 할 일이 많아서였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저 마케팅을 위한 책 제목이 아니었다는 게 대우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김 회장이 영면에 들었다는 기사에는 애도의 댓글도 많았지만 ‘분식회계의 주범’ 같은 비판의 글들도 많았다. 실제로 조그만 무역회사로 출발해 32년 만에 재계 2위까지 성장한 대우는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아 재무 부실이 부각되면서 한국을 큰 혼돈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많은 부분 한국 성장 시스템의 문제였지 개인의 일탈은 아니었다. 공과 함께 과가 있다고 해서 김 회장이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여러 에피소드를 배출해낸 부지런함, 무역맨 특유의 세계시장을 내다보는 큰 시각, 1980년대 당시 취직할 길이 없었던 운동권 출신 386들을 입사시켜 경제 역군으로 일궈낸 포용력까지 그는 큰 사람이었다. 당시 세계 어디를 가도 공항에서부터 ‘대우’라는 브랜드를 볼 때 한국인들은 ‘우리가 글로벌화를 이루고 있구나’라는 뿌듯함을 느꼈다. 현대중공업 계열사인 대우조선해양은 지금도 수주에 도움이 된다며 ‘대우’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런 거인들이 성장시켰다. 빈농의 아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4번의 가출 끝에 쌀가게 직원이 됐다가 자동차를, 중공업을, 건설을 창업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가지지 못한 기술을 외국과의 제휴로 해결했고 외국 기업의 견제와 비아냥거림을 뚫고 자체 기술을 개발하면서 역사를 이뤄냈다.

타고난 부를 그저 누려도 됐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무역으로 시작해 ‘기술보국’ 이념하에 가전을, 반도체를, 중공업을 일으켰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 될 것’이라는 혜안으로 반도체 진출을 알린 ‘도쿄 선언’은 동아일보가 외부 자문위원 30명과 뽑은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최고의 순간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휴대전화를, D램 반도체를 세계 1위로 올려놓았다.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겠나. 도쿄 선언에는 “과대망상증 환자”라던 미국 인텔의 비웃음이 따랐다. 19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이건희 회장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을 조 단위 이익을 내는 회사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는 “재벌 2세의 안이한 상황 인식” “조가 애 이름이냐”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 한 회사만 지난해 44조 원의 순이익을 냈다.

고도성장기는 지났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건 거인들의 이런 도전정신이다. 정주영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이 나라를 책임질 젊은이들을 일깨워주고 싶다.” 어느 때보다 앞날이 잘 안 보이는 요즘, 우리는 한국 경제사에 존재한 이런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야 한다. 멀리 내다봐야 새 거인이 탄생할 것 아닌가.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


#김우중 회장#창업주의#도전정신#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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