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비 후 공격’ 선보인 정도전…정치선 유연성 잃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9일 15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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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은 진법(陣法)을 편찬했다. 여기서 ‘선 수비 후 공격’이란 전술개념이 등장했다. 군을 방패부대와 보병-궁수-기병 순으로 배치해 적이 쳐들어오면 방패로 진을 치고 적이 다가오는 동안 사격으로 최대한 피해를 준다. 이 과정에서 적이 후퇴하면 후위의 기병을 출동시켜 추격한다. 적이 보병진에 육박하면 기병을 좌우로 출격시켜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한다. 또는 보병이 싸우면서 적을 끌어들인 뒤에 기병을 출동시켜 같은 방식으로 타격한다.

이 개념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적을 초전에 제압하거나 공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수세적인 듯한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살해되고 역적이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도전의 정적들도 이 개념은 수용했다. 세종 대에 변계량이 진법을 개정했는데, 반대론자들에 맞서서 선 수비 후 공격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 후 문종의 교정을 거치면서도 이 개념은 살아남았다.

선 수비 후 공격 전술은 중무장 보병 전투 같은 백병 전력이 약한 대신 궁수와 기병, 둘을 결합한 궁기병이 최대 장점이었던 우리 군의 특성에 잘 어울렸다. 또 하나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전투는 파도와도 같으며 누구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공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는 병사의 투지로 훌륭하지만, 전술이 그래서는 안 된다. 전술의 생명은 유연성이다. 적을 끌어들이고 감싼 뒤에 섬멸하는 것이 최고의 전투기술이다.

정작 이 개념을 도입한 정도전은 정치에서 유연성을 잃었다. 명의 압송요구, 거세진 정적들의 공격에 한발자국이라도 밀리면 끝장이란 강박증이 생겼던 것 같다. 요동공격을 추진하면서 정도전은 더욱 ‘하드’해졌다. 자신의 세력이 점점 축소되고 고립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안타깝다. 그는 왜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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