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그 남자가 ‘재원’이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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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남우석 씨는 월가에서도 촉망받는 재원이었습니다.” 보름 전쯤 종영한 TV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한 대목이다. 이 짤막한 대사 하나로 주인공 남자(하석진 분)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로 변해버렸다. ‘재원’이라는 말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재원을 ‘재주 있는 사람’, 즉 재원(才員)일 거라 지레짐작한다. 허나, 우리 사전 어디에도 그런 재원은 없다. 재화나 자금이 나올 원천을 뜻하는 재원(財源),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제사 지내기 전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을 멀리하는 곳을 이르는 재원(齋院),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재원(才媛)’만이 올라 있을 뿐이다. 才媛의 媛은 ‘미녀 원, 아름다울 원’으로 새기는데 ‘계집 녀(女)’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여성에게만 쓸 수 있다. 재녀(才女)와 의미가 비슷하다.

홍일점(紅一點)도 여자에게만 써야 한다. ‘푸른 잎 가운데 피어 있는 한 송이의 붉은 꽃’이라는 뜻으로 송나라의 대학자이자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의 영석류시(詠石榴詩)에서 나왔다. 여럿 속에서 이채(異彩)를 띠거나, 많은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여자를 비유적으로 일컫는다. 그럼, 많은 여자 사이에 끼어 있는 한 남자를 이르는 말은 뭘까. ‘청일점(靑一點)’이다. 홍일점에 대응하는 말로 나중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극 중 남우석 씨에게 어울리는 말은 ‘재자(才子)’다. 한자 그대로 ‘재주가 뛰어난 젊은 남자’를 일컫는다. 헌데 이 표현, 별로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재(人才)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이참에 재원이니 재자니 하는 어려운 말 대신 ‘기둥’이나 ‘실력자’ 등으로 쓰는 건 어떨까. 뜻도 제대로 모르고 쓰다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백 번 낫다.

최근 ‘여류(女流)’라는 말도 거의 사라졌다. 여류란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여류 소설가, 여류 화가, 여류 명사 등으로 쓰였다. 이 말은 남자 중심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자가 적었던 시절에 쓰던 말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뛰어난 여성도 많아지면서 의미를 잃었다. 금남의 벽을 뚫는 남성들도 있다. 간호부(看護婦)가 간호사로 바뀐 데는 남자 간호사가 생긴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남녀의 역할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여성에게만, 혹은 남성에게만 쓰는 단어는 점차 줄어들 게 틀림없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재원#전설의 마녀#홍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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