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개발한 과학기술은 인간의 손을 떠난다. 그 과학기술은 언젠가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인간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음식을 만드는 칼이 때론 무기가 되듯이. 특히 원자력과 핵 같은 것이 그렇다.”
당시 과학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과학자도 철학과 종교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새롭게 발명한 과학기술이 훗날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퍼지게 된 것이 과학철학이고 과학사(科學史)였다. 과학사 과학철학 협동과정이란 것이 대학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선배의 말 가운데 “과학은 인간의 손을 떠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그 선배와의 대화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요즘 많은 사람에게 과학기술은 디지털기술로 다가올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것 말이다. 이들의 공통된 속성은 ‘빠름’이다. 그 빠름에 힘입어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너무 빠른 나머지 식당에 가도 지하철을 타도 누군가를 만나도 사람들은 앉자마자 스마트폰부터 꺼낸다. 대화 도중에도 열심히 문자를 주고받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위다. 예의 없음이다. 좀 더 근본을 파고들어 가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그 빠름으로 사람들을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디지털기술이 대체로 그렇다. 참지 못하기에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 배려가 줄어들고 깊이 있는 사유가 사라진다.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마트폰대로 생각한다.
정부가 디지털교과서 제작을 추진 중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스마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교과서를 만들어 초중고교에 전면 적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효과 등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이번 박근혜 정부는 범위와 대상을 줄였다. 축소하긴 했지만 디지털교과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와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데,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스마트기기에서 떨어뜨릴 수 있을지 부모와 학교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왜 굳이 교과서까지 디지털로 바꾸겠다는 것인가.
활자의 매력, 종이의 감성을 충실하게 느끼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술은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다. 저 들판에서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고, 종이 넘기는 소리도 들려 줄 수 있다”고. 기술의 약점을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이 극복해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직접 넘길 때 느끼는 소리와 디지털기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다르다. 박물관에서 문화재를 감상할 때 복제품에서는 제대로 된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으로 압축성장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성장이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매몰되다 보니 챙겼어야 할 여러 과정과 생각을 빼먹은 것이다. 그 압축성장을 지나 우리는 디지털기술의 빠름 속에서 많은 것을 또 놓치고 있다. 배려와 예의, 기다림, 철학적 사유 같은 것 말이다. 디지털기술도 인간의 손을 떠나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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