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86>아름다운 저녁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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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박주택(1959∼)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작은 저녁이었다
우유를 먹은 배가 슬슬 부글거릴 때쯤
부딪쳐서 돌아올 것이 없는 초원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짜는 돌아온다
벌레들이 풀과 풀 사이를 건너뛰고 개 짖는 소리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사실
(듣기를 달리 들을 뿐이지!)

작은 저녁이, 노을이 파고든 자리 어둠이 파고들어서
사람들이 자신 속으로 걸어가 자신이 되는 저녁
여기에도 사람이 살아 긴 옷을 끌며
맨발로 흙 위를 걸으며 돌아가는 법을 배우지

초원을 건너오는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
딱 하고 옆방에서 커피포트 멈추는 소리
벌레들의, 까마귀들의, 목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불안도 잠자지 않고 순간에 부딪치는 말처럼

생각들이 칼칼하게 치뜨고 있는데
불안과 불안이 부딪치는 불꽃들

겨우 요양하는 기분인데 날이 갈수록 유배되는 기분
그러나 이곳 날씨는 여름, 꽃들과 함께 놀아, 무엇을 하든
어른이잖아?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문화 수준이 높아서 여행을 좋아하는 이가 많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어디 먼 데를 다녀오고 싶어 한다. 요즘은 저렴한 항공권이 많아 좀 무리를 하면 현실의 자잘한 문제들을 다 잊어버리고 붕 떠날 수 있을 테다. 그렇게 떠나왔는데 이 시의 화자처럼 문득 유배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풍경은 아름다운데 뭔가 불안하고 즐겁지가 않다. 소화가 안 되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신경이 곤두선다. 집이니 직장이니, 소속된 사회로 돌아갈 날짜가 가까워져서 그럴까. 신용카드 결제일도 돌아올 테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을 테다. 떠나도 머물러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불안하구나. ‘그러나 이곳 날씨는 여름, 꽃들과 함께 놀아!’ 난 어른이잖아. 내 삶을 걸머지도록 하고, 이 순간을 즐기자!

화자의 불안하고 쓸쓸한 심기가 적막하니 번지는 ‘아름다운 저녁’이다. 황혼은 왜 가슴을 죄어들게 할까? 저마다 몸을 오그리고 자신의 고치 속에 들어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저녁. 아침 빛이 내려오면 그 고치들 이슬처럼 깨어지겠지. 여기저기서 꼬깃꼬깃 접힌 날개를 펴겠지. 아름다운 아침이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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