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8>내가 바라보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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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처마 밑에 던져 놓은 빈 맥주 깡통 위로 밤새 빗물이 떨어진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하고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서 깡통을 멀리 차버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화자는 거기서 목탁소리를 듣는다. 비어 있는 알루미늄 깡통에 처마 끝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목탁소리와 닮기도 했겠지만, 우리는 대개 제 마음속에 담겨 있는 단어와 감정을 불러낸다. 쓸모를 다해 버려진 빈 깡통의 맑은 울음을 듣는 시인의 맑은 귀!

알 굵은 감자는 비싼 상품이지만 자잘한 감자는 손만 많이 가고 돈이 안 되니까 그냥 던져 버린다. 함부로 버려져 썩어가던 감자가 꽃을 피웠더란다! 그 감자의 애틋한 생명력과 쓸쓸한 용기를 시인은 기록한다. 크고 화려하고 힘센 것, 가령 돈과 정치와 권력과 개발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퍼져 있는데,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끌어가는 세상도 있다고, 그 세상을 무화(無化)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화자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삼라만상의 존재가치가 슬프게도 사람 입장에서 본 쓸모 여부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쓸모를 다해 버려진 것들, 하찮은 것들, 약자들의 존재가치를 옹호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여린 마음과 따뜻하고 맑은 세계관이 그려진, 참 드물게 고운 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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