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5>동해남부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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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남부선
―백무산(1955∼)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오래전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저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고무공장에 일 다닌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다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열일곱 살 소녀와 스무 살 안팎일 청년, 둘이를 소나기가 만나게 했네. 소녀는 고무공장에 다닌다고 했네.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 소녀,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어’ 청년은 그 손을 놓지 못했네. 측은해하는 마음과 사랑이 한 쌍의 떡잎처럼 돋아났네. 아, 그러나 청년은 어쩌다 그 마을에 흘러들어 바닷가 일을 하던 나그네, 어쩌다 보니 어느 결에 마을을 떠났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가 탄 기차가 그 마을 작은 역에 잠시 서고, 그러자 잊고 있던 그 소녀가 생각났는데,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지나가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양손에 무거운 짐을 지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서른은 훌쩍 넘겼을 아낙이 화자의 마음에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크고 거친 손인 ‘아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왜 좀 뽀얘지지 않은 거니? 왜 세 살 팔자 여든 가는 거니! 화자는 안쓰러움에 애달프고 비통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기차는 떠난다. 그 오래전처럼.

내가 그 여인이라면 화자의 이 측은지심에 화가 날 것 같다.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내 고향마을에서 애를 셋씩이나 낳아 기르고, 양손에 무겁도록 들고 다닐 게 있는데, 이만하면 버젓한 삶이 아닌가요? ‘저토록 소박한 행복!’이라고 경탄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내 생의 첫 타자(他者)였던 당신! 여전히, 그러나 다른 의미로 타자로군요. 부디 안녕히.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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