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4>이것은 사람이 할 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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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1967∼)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브라보! 포스가 여간 아닌 멋진 시다. 시 속의 늙은 여가수나 그에 대한 시인의 묘사나, 가슴에 핏물처럼 배어드는 노래의 깊은 울림! 그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직접 듣고 난 듯 저릿저릿하다. 사람들은 즐거울 때만 노래하지 않는다. 즐거운 노래만 즐겨 듣지 않는다.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고 떫고 쓴 맛을 사골국물처럼 우려낸 노래가 얼마나 우리의 노심초사를 진정시키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지. 마치 어둑한 밤처럼 우리를 포근히 안겨 쉬게 하는지. 그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시인이 어떻게 또 노래하는지 보라. 삶과 술과 담배에 찌들어 남자같이 걸걸해졌을 목소리의 그 여가수는 아마 뒷골목의 삶을 산 적이 있으리라. 굴곡지고 때로는 처참했을 그이의 한 생이 담긴 그 목소리에는 페이소스 가득하리라. 한 늙은 여가수의 생의 행로가 담긴 듯한 노래를 들으며, ‘당신, 꼭 나다. 어찌 내 속을 이리 잘 알고 아픈 곳을 딱 건드려 주느냐’, 시인은 공감과 찬사를 보낸다. 시의 유장한 어조와 가락에 독자는 절로 박자를 치게 되누나. ‘까악까악 까마귀/훌쩍훌쩍 뻐꾸기’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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