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6>날마다 설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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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설날
―김이듬(1969∼)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벌써 유월도 중순에 접어든다. 이럴 수가…. 설날이 엊그제 같은데, 또 금방 내년이 되겠지! 여섯 달 가까이, 그 많은 시간을 뭐 하고 지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지나가고,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의 길이는 순식간이고. 그래서 나같이 어영부영 사는 사람은 항시 시간이 없다고,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초조한데, 충실히 사는 사람들은 느긋한 것이다. 그들은 세월이 빠르다는 한탄을 덜 한다. 그들에게는 더 긴 시간이 주어졌기에.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낯설다’, 즉 새롭다는 뜻의 ‘설’ 아닐까 화자는 짐작한다. 쉽사리 사랑에 빠지고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운동은 통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새해부터는 싹 바뀌어 보리라, 설날을 기해 화자는 마음을 다잡았는데, 사흘이 못 간다. 만취한 채 잠들었던 낯선 방에서 깨어난 화자, 어찌나 자신이 한심하던지 눈물도 나지 않는다. 아, 환멸이야! 그러나 이내 화자는 자기의 ‘뜻한 바’에 혀 한 번 쏙 내밀고, 씩씩하게 생각을 고쳐먹는다. 새해 결심이라는 게 뭐냐? 작심삼일이었다고 한 해를 다 망친 듯 속상해 하지 말자.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로운 날, 날마다 설날! 어쨌거나,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런 감정의 불모 상태, 나한텐 너무 어려워. 무리하지 말자. 결심을 새로 해야지. 나답게 살자, 생긴 대로 살자! 재밌고 개성 넘치는 시다. 화자의 주문을 따라 되뇌고 힘을 내볼까. 일신우일신! 새롭게 또 새롭게,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세!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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