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구]도둑을 도둑이라 못 부르고…

  • 동아일보

이진구 사회부 차장
이진구 사회부 차장
불법(不法)이 아니라고 모든 게 용인되는 건 아니다. 세상엔 불법이 아니라도 해선 안 될 일이 있고, 법은 그중에서도 이것만은 어기면 안 된다고 규정한 최소한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를 유지하는 건 준법(遵法)이 아니라 양심(良心)이다. 그 양심의 기준은 사회 지도층일수록 더 높게 요구된다.

‘배임(背任).’

법적으로는 ‘업무상 다른 사람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로 정의한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선후보가 중도 사퇴로 챙긴 대선 보조금 27억여 원은 법적으론 ‘배임’에 해당되지 않는다. 공직선거법상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이 대선후보를 내면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게 돼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법적’인 해석일 뿐, 사회지도층에 요구되는 양식으로는 분명 ‘배임’에 해당한다고 나는 본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배임은 ‘주어진 임무를 저버림. 주로 공무원 또는 회사원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가나 회사에 재산상의 손해를 주는 경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로 법적 해석보다 폭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가진 일반적인 사고를 정의한 국어사전과 법률적 정의의 차이를 나는 ‘양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그중에서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것임에도 했다고 다 처벌하지는 않되, 그로 인해 피해가 생기면 처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민의 세금으로 후보를 지원하는 건 금권 정치를 막고, 소수 정당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금권 정치엔 필연적으로 로비가 뒤따르고, 결과적으로 돈 있는 사람이 정치를 독점하게 된다. 당선 가능성이 작은 소수 정당 후보라도 출마하면 그 후보로 인해 소수의 의사가 표출되고,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이며, 소수 정당의 후보라도 선거를 완주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후보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정책과 비전을 알려야 하며,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원받은 경우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을 떨어뜨리기 위해, 중도 사퇴로 남은 돈을 챙기기 위해 출마해선 안 된다. 이건 법 이전에 양식의 문제다.

18대 대선 공식선거운동은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됐고, 통진당은 다음 날인 28일 보조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전 후보는 각 가정에 배포되는 2차 선거 공보물을 제출 마감인 이달 6일까지 내지 않았다. 선거운동 기간 44차례나 할 수 있는 TV, 라디오 연설은 라디오만 단 한 번 했고, 130회에 이르는 신문, TV, 라디오 광고는 신문만 한 번 했다. 통진당의 의사결정 구조를 조금만 안다면 이런 결정을 이 전 후보 혼자 즉흥적으로 내렸다고 보기 어렵다. 공보물 제작 시간과 이보다 훨씬 더 걸리는 사전 계획 단계를 포함하면 이미 선거운동 기간 시작 전 또는 후보 등록 전에 중도 포기 방침을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도 보조금을 받고, 중도 포기로 남은 돈을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저버리고 국가와 사회에 손해를 끼친 행위가 아닌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 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도둑’이다.

이진구 사회부 차장 sys1201@donga.com
#배임#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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