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까지 29일 남았다. 10년째 한국 외교안보정책의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본 한 일본 언론 서울특파원은 “솔직히 헷갈린다”고 털어놨다.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이 너무 비슷해 차별성을 찾기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문, 안 후보를 보좌하는 외교안보 참모들이야 과거 한배를 탔던 사람들이 많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박 후보까지 수렴되는 현상은 의외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에번 램스태드 기자는 아예 “세 후보 중 누가 당선돼도 햇볕정책으로 회귀(回歸)할 것”이라고 확언한다.
최근 한 달 사이 각 후보가 내놓은 외교안보 공약집을 꼼꼼히 뜯어보니 과연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튼튼한 안보, 유연한 대북정책’으로 요약하면 얼추 세 후보를 다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외관계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인 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대목도 일치한다.
‘자주적 국방능력을 갖춰 확고한 대북 억지 전력을 확보하겠다.’(문)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억제 전략을 지속 발전시키겠다.’(안)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무력화할 수 있는 억지력을 강화하겠다.’(박) 세 후보 안보정책의 핵심이다. 각 진영 캠프 인사도 식별하기 어려운 판박이 정책이다. 이 밖에도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차질 없는 추진, 장관급회담 등 남북 대화채널 복원, 남북 간 합의 이행 촉구 등 닮은꼴 정책이 부지기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10년의 대북 유화 정책과 이명박 정부 5년의 남북관계 전면 중단에 대한 반성이 작용했을 것이다. 야권은 우(右)로 한 클릭, 여권은 좌(左)로 한 클릭하면서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았을 수도 있다. 야권의 한 외교안보전략가는 “어차피 당락(當落)을 가를 사생결단의 승부처가 아닌 분야에서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암묵적 합의”라고 말했다. 외교안보정책은 큰 틀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행간에 드러나는 후보들의 숨은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 후보 공히 남북 간 기존 합의의 존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박, 안 후보는 변화된 한반도 정세와 남북한의 사정이라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 문 후보는 2007년 10·4선언을 콕 찍어 노무현-김정일의 약속 지점이 출발선이며 이행의 속도는 ‘획기적’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해양 영토선인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현상 변경과 관련해 양보를 시사하는 듯한 논의가 있었다는 논란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10·4선언의 완전계승을 공약으로 내건 문 후보의 ‘NLL 수호’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안보 비전문가 안 후보의 불안한 모습도 종종 드러난다. “북한 인권은 민감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며 북한 인권의 ‘실질적 개선’을 약속하면서도 ‘북한인권법’ 제정에는 선뜻 찬성하지 않는다. 제주 해군기지가 필요하지만 강정마을 주민에게는 사과하겠다는 자세도 이해가 안 간다. 안보는 보수이지만 대북화해 협력에 적극적인 문 후보와 단일화해야 한다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순일 수도 있다.
한반도 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한 비전코리아 프로젝트의 전제조건으로 ‘신뢰 회복’과 ‘비핵화 진전’을 들고 있는 박 후보가 쉽게 북한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진정한 남북대화 재개 의지에 대해 북한은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결국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최악의 ‘깜깜이 선거’는 유권자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보관돼 있다는 NLL 대화록은 대선 전까지 공개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대선 최종 대진표는 없고 외교안보정책에 관한 토론은 실종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답답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