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중현]굿바이! 옐로브릭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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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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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1939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명작이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 작품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 뜨거웠던 경제 논쟁의 패러디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93년 미국은 심각한 공황을 맞았다. 금(金)본위 체제 아래서 재정이 바닥나자 통화량이 부족해졌고, 심각한 디플레이션(물가하락)과 경기침체가 닥쳤다.

가진 거라곤 농작물과 빚밖에 없던 농민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수입이 줄고, 화폐로 표시된 빚 부담이 커졌다. 이들을 대변하던 인민당은 은(銀)본위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금보다 풍부한 은을 기초로 화폐를 찍어 내면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유발돼 농산물 값이 높아지고, 화폐로 표시된 농민의 빚 부담이 줄어든다는 논리였다.

당시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은화의 자유로운 주조’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1896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브라이언은 “황금의 십자가에 인류를 못 박지 말라”는 명연설로 농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대선후보가 됐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피해를 보는 동부의 은행가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금본위제 유지를 약속한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를 25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작가 L 프랭크 봄은 이런 상황을 동화 곳곳에 은유적으로 끼워 넣었다. 오즈(oz)란 이름부터 귀금속의 무게 단위인 ‘온스’의 약자다. 도로시의 집이 떨어지면서 깔려 죽은 나쁜 마녀의 ‘은 구두’는 캔자스 농촌 소녀 도로시를 집에 데려다 줄 마법의 도구다. 도로시는 이 구두를 신고 황금 벽돌길(옐로브릭 로드)을 밟으며 오즈를 찾아 나선다. 봄은 은본위제에 동조하는 자신의 정치색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후 1, 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유지되던 금본위제는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면서 폐기됐다. 2년 뒤 오즈의 마법사에서 모티브를 딴 엘턴 존의 명곡 ‘굿바이 옐로브릭 로드’가 나왔다.

역사 속에 묻혔던 금본위제가 올해 미국 대선의 쟁점으로 다시 등장했다. 밋 롬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금본위제 재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물론 재도입 가능성은 높지 않다. 금본위제는 금융버블 등을 줄이는 덴 효과가 있겠지만 경제위기 때 정부와 중앙은행의 발을 묶어 파국을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금본위제 재도입 주장은 오바마 행정부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팽창적 통화·재정정책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카드로 보인다.

먼 나라의 오래전 얘기지만 금·은 본위제가 정면충돌하던 110여 년 전 미국의 상황은 지금 한국경제에 시사점이 있다. 최근 부동산 값 하락과 가계 부채로 인한 소비 침체 등으로 디플레이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상 이변에 따른 농산물 가격 상승 등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긴 하지만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년 3개월 만에 최저다. 이런 상황에서 922조 원의 막대한 부채가 가계를 짓누르고 있다.

돌파구는 기업 활동을 격려해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이 상승하게 하는 것뿐이다. 임금 상승만 따라준다면 약간의 인플레이션은 심지어 가계 부채 부담을 줄여 주는 효과까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 정책은 인플레이션 대응에만 집중돼 있다. 물가를 영점 몇 %포인트 떨어뜨리려고 수익을 낮추도록 기업을 압박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여력을 줄이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초유의 디플레이션 문턱에서 정부가 장기 불황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으려면 두세 단계를 앞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옐로브릭 로드#정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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