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가 수단대사관 앞에서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는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수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 몰랐다. 국제뉴스 에디터에게 아프리카의 기아, 양민학살은 항상 주요한 관심사지만, 지난해 남수단 독립으로 수단의 상황은 대충 정리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클루니 체포소식에 수단문제 부각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클루니 체포를 계기로 세계 언론들이 수단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현지 상황은 심각했다. 남수단 국경지역의 분리주의 무장세력 소탕을 명분으로 한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2003년 다르푸르 학살 같은 참극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공군기가 건물을 무차별 폭격하는 가운데 군인들은 집과 곡식을 불태우고, 폭격을 피해 인근 누바산의 동굴 속으로 피신한 양민들은 아사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위기는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그동안 인근국 유엔 직원들이 수단 위기를 수차례 경고했지만 지구촌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클루니가 양민학살에 항의하다 체포됐다는 소식에 비로소 스포트라이트가 수단으로 집중된 것이다.
문득 차인표 씨가 출연한 TV 토크쇼의 장면이 생각났다. 탈북자 북송 반대에 앞장선 이유를 묻자 차 씨는 어린 시절의 일을 들려줬다. 네댓 살 때 집의 지하실로 통하는 구멍에 얼굴을 넣었는데 얼굴이 끼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울어도 소리는 지하 어둠 속으로 묻힐 뿐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형이 동네가 떠나갈 듯 울기 시작했다. 어른들을 부르기 위해 대신 울어준 것이다.
지금 클루니가 하는 일이 바로 차인표 형의 울음과 같은 게 아닐까. 동생을 위해 울어준 형처럼 클루니는 산속 동굴에 입이 갇힌 수단 주민들을 대신해 울어준 것이다.
'대신 울어주기.' 어쩌면 그것이 유명인(celebrity)의 사회 참여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엔 누군가가 대신 울어줘야 할 처지에 놓인 이가 많다. 북송 위기에 처한 탈북자일 수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구조조정을 당한 노동자일 수도 있고, 철거민일 수도 있고, 버려진 동물일 수도 있다.
인기와 영향력이라는 확성기를 지닌, 남들보다 큰 울음소리를 낼 수 있는 스타들이 그들을 위해 울어주는 것은 사회가 인기를 준 데 대한 보답이다.
하지만 대신 울어주는 것은 악이나 떼를 쓰는 것과는 다르다. 연예인이건 작가건 교수건 언론인이건, 유명인의 정치·사회적 발언에는 영향력이라는 특혜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일반시민의 술집 넋두리와는 다르다. 인기에 수반되는 영향력은 마음대로 휘둘러도 되는 배타적 특권이 아니다. 유명인의 정치·사회적 발언은 진실성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현안의 사실관계나 역사적 맥락, 입체적 다층적 진실에 대해 기초적인 공부조차 하지 않은 채 선명성 넘치는 발언을 툭툭 내뱉는 경박한 태도는 인기를 유독한 바이러스로 변질시킨다.
남을 위한 울음이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기희생과 진솔함도 요구된다. 말로는 민중, 약자를 위한다면서 자기 손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입만 열면 자본주의를 공격하면서 자신은 자본주의 단물 사다리의 꼭대기에 앉아 호사를 누리는 태도로는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인기인 사회참여 방법 보여줘
클루니는 이달초 수단 산악지역 동굴을 찾아갔다. 로켓포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옆 사람이 포탄에 맞았다. 그런 위험한 방문을 수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미 의회가 움직이고 미 행정부는 수단산 석유 주 고객인 중국을 설득하고 있다.
'개념 연예인'의 대명사인 앤젤리나 졸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3세계 어린이를 위한 봉사의 삶을 살다간) 오드리 헵번의 삶은 어린 졸리의 삶을 바꾸었다. 또 어디선가는 졸리의 삶을 보고 누군가의 삶이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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