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엄친딸 나경원’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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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4일 19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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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같은 여자로서(라는 표현은 정말 싫지만)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의 ‘청탁 전화설’ 파동을 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엄친딸(엄마친구 딸)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나경원은 예쁘고 공부도 잘해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사’자 붙은 남자에게 시집까지 잘 간 데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여자다. 겉으로만 보면 서울대 출신 탤런트 김태희가 돌연 비례대표가 되고서는,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남자들의 로망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1억 피부과설’이 불거졌을 때 그래서 여자들은 놀라지 않았다.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면서도, 나경원 같은 엄친딸이 기득권 구조를 또 한 번 굳히는 게 싫어 박원순 후보를 찍었다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아니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곱고 편하게 살 수 있었던 나경원이 ‘고행’을 자처한 데서 나는 우파의 전형을 본다. 지금 논란의 중심에 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유주의 우파의 핵심 가치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학생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을 간 것처럼, 나경원은 야당 대변인 때나 시장 후보 때나 TV토론을 앞두고는 밤새워 시험 공부하듯 준비한 덕에 “똑똑하게 말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이 시장 후보를 못 구하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섰다가 낙선한 뒤 “내 선택에 책임지는 것이 맞기 때문에 (당을 위한 희생을) 후회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한 말은 요즘처럼 남 탓 넘치는 세상에 감동마저 준다. 나경원을 엄친딸이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보면, 더 많아져야 할 국민상(像)이지 증오 대상일 순 없다는 얘기다.

국가 정체성·우파 기득권에 공격

그는 정치를 하게 된 큰 이유가 아픈 딸을 키우면서 사회를 바꿀 필요성을 느껴서라고 했다. 보수라는 사람들이 사회에 무책임했기 때문에 비판받았다며 “분명한 원칙 속에서 자신의 행동과 인권 문제 등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라고 2005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말했다.

말로만 진보가 외면해온 북한인권법 제정안을 2005년부터 주도한 사람이 나경원이다. 지금은 전면 무상급식에 대한 당심이 바뀌었지만 그가 주장한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어려운 사람부터 복지를 확대하는 ‘정직한 복지’는 진정한 보수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시시한 남성의원 수십 명보다 나았던 나경원에게 유독 말도 안 되는 공격이 집중된 이유를 “나경원 자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기득권이기 때문에 종북세력으로서는 타파해야 할 대상”이라고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지적했다.

전후 사정과 상관없이 현재 사안의 핵심은 나경원의 남편 김재호 부장판사가 아내의 사건과 관련해 박은정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했느냐가 됐다. 나경원은 “기소청탁을 한 일은 없다”면서도 전화를 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밝히는 게 우선이고 수사를 해서라도 밝혀야 할 일이지만, 어쩌면 통화는 했으되 청탁이라고 할 순 없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성명대로 김 판사는 탄핵받고 나경원은 정계은퇴를 할 사안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특히 나경원이 오세훈 전 시장 편에 섰다가 낙선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낙천시킬 궁리를 하는 새누리당 일각에선 계산을 잘해야 한다. 앞으로 줄줄이 나꼼수가 쏘는 대로 날아가는 제물이 나올 수 있다.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로 수감 중인 정봉주 전 의원을 놓고도 마케팅을 하는 민주통합당과는 게임도 안 된다. 오죽하면 변희재가 “종북이면 이념이나 있고, 친노면 의리나 있고, 나꼼수는 재주라도 있지, 새누리당은 진짜 무능좀비”라고 트위터로 칼을 날렸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 ‘전화 한 통’ 해볼 대상이 없는 보통 국민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게 사실이다. 나경원 스스로도 “정치인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국민이 옳지 않다고 도덕적으로 판단하면 비난받을 수 있다”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강조했다.

‘전화 한 통’ 특권도 내려놓을 때다

혈연 학연 지연의 기득권 구조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말고는 아쉬운 적 없이 살아온 세력은 이제 전화 한 통의 관행도 반칙이 되는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일만 잘하면 된다고 믿어온 능력주의 우파라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 깐깐함이 적잖은 사람에게 차별과 소외로 작용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높은 사람, 있는 사람부터 더 내려놔 갈등을 푸는 게 시대적 흐름이고 과제다.

단, 대안 없이 분노만 자극해 정권을 잡으려는 세력에게는 결국 그 분노의 칼이 부메랑이 돼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 바로 노 정부의 한 실세였던 김병준 전 대통령정책실장이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는 책에서 한 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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