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누구 좋으라고 ‘체제’를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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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9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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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학교 왕따 문제가 분단과 민주화 때문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믿을까. ‘분단 체제’와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2013년 체제’로 가야만 왕따 같은 참담한 현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신선 같은 얼굴로 2013년 체제라는 말을 들고 나와 확산시킨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명예대표(이하 백낙청)다.

2013년 체제論의 이상한 냄새

2013년 체제는 단순히 대통령을 바꾸거나 정권교체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식견이 있는 윤여준 씨도 작년 11월 ‘2013년 체제를 향하여’라는 토론회에 나와 “체제라는 말은 1987년 헌법을 고쳤듯이 사회구조적 변화가 있을 때 붙이는 말”이라며 뜨악해했다. 백낙청이 사회자로 옆에 있는지라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뜻이라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이다.

한번 ‘프레임’에 엮이면 의식하든 못하든 그 틀로 세상을 보게 되는 법이다. 2013년 체제라는 말도 별생각 없이, 선의에서 나온 줄 알고 자꾸 쓸수록 백낙청류(類)가 치밀하게 짜놓은 프레임에 빨려 드는 현상이 일어난다. 벌써 4·11총선에서 야권이 이기고 대선까지 승리해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 새로운 세력이 “87년 체제와 더불어 그 본질적 제약으로 작용한 53년(분단) 체제를 타파하는 일”이 2013년 체제의 과제라고 백낙청은 최근 저서 ‘2013년 체제 만들기’에서 밝혔다. 그에게 87년 체제는 민주화시대가 아니다. “87년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혁은 아니었고… 97년 신자유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87년 민주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논자도 있다”는 식으로 자유민주·시장자본주의 체제를 평가 절하한다.

분단 체제도 백낙청은 “남북이 적대적이면서도 동일한 ‘체제’라고 말할 만큼 쌍방 기득권세력이 공생관계이고 나쁜 점을 닮아가며 재생산되는 구조”라며 대한민국 체제와 북의 김정은 체제를 동격으로 봤다. 남북의 현저한 격차에도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따라서 2013년 체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북연합’으로 분단현실을 공동 관리하는 ‘1단계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에게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심지어 사회주의도 원칙상 용인되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이 자유민주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수령독재 체제라는 사실에는 입을 다문다.

민주통합당의 잠재적 대선주자인 문재인이 같은 토론회에서 “남북 평화체제로,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고 백낙청에게 사실상 동의한 점은 중요하다.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2013년부터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정말로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무덤에서 걸어 나올까

그들이 꿈꾸는 체제를 들여다보면 민주당이 노무현 정부 때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왜 이제 와선 기를 쓰고 반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당의 노선과 정체성이 중도개혁에서 ‘진보’로 바뀌어서다. 민주당 강경주류에게 한미 FTA는 가장 극악한 형태의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로 보이니 보편적 복지와 병행할 수 없는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벌이는 복지경쟁도 별 차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현 체제 내의 복지 확충이고, 민주당의 무상시리즈 ‘보편적 복지 3+3’은 다른 체제를 바탕색으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민주주의를 하는 스웨덴의 복지모델도 국가에 의한 보편적 복지에 치중했다가 1990년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시장경쟁을 도입해 국가경쟁력을 키웠다. 이에 비하면 민주당 복지는 그야말로 수구 꼴통 식이다. 앞으로 헌법 119조의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천명한 1항과 ‘경제 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을 명시한 2항을 어떻게 ‘해석 개헌’할지도 주목거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보라는 사람들은 왜 그리 체제를 바꾸지 못해 안달일까. 가장 통 크게 진보임을 자부하는 쪽이 누군지를 보면 짐작이 가능해진다. 정말이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식 사회주의제도 체제’를 자랑하는 북의 노동신문은 작년 김정일이 사망하자 “세계의 진보적 인류가 커다란 슬픔에 잠겨 있다”고 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이 지향한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이들이 폭력투쟁을 포기한다면 사회민주주의로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들이 지난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야 한다고 극렬히 주장했는지 알 것 같다. 과거 전두환 정권이 자생적 진보세력을 키웠듯이, 민심을 잃어 또 다른 주자들을 만들어낸 이명박(MB) 정부가 원망스럽다. 어쩌면 올해 선거는 MB 대 반MB,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주의의 체제 선택 전쟁이 될 수도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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