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니는 아들 녀석이 며칠 전 내게 다가와 입대를 신청했다고 한다. 내년 1월 ○○사단에 갈 것인데 수송병과를 신청했단다. 나는 왜 ○○사단이고 수송이냐고 다그쳤다. 수송을 해야 편하고, ○○사단은 후방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 가까이 있는 수송부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아빠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 말해 달라고 한다.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38년 전 최전방에서 3년간 근무하고 제대 후 새로운 생을 개척했던 나와 아버지의 일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1977년 11월 나는 꿈에서나 그리던 제대를 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겨울이 시작되는 어느 추운 날 나는 아버지께 조심스럽게 내 진로를 말했다. 약 2000평 되는 과수원을 버리고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하고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던 형님이 돌아가시고 농사일은 온통 막내인 내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 막중한 임무를 아버지께 돌리고 집을 나서겠다고 했다. 방바닥에 물을 엎지르고 쩔쩔매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안절부절못하더니 한참 후에야 냉정을 찾아 “무슨 공부를”이라며 에둘러 태연한 척했다. 그 물음은 놀기 좋아하는 네가 많은 농사 앞에서 꾀를 부리는 것 아닌가 하고 엉터리 계획이라도 들어 보자는 심산이었다. 나는 “공무원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평소 허락을 잘 하지 않던 아버지께서 “그래 해봐라”라고 하셨다. 난 그때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주인 잃고 헤매는 어느 장수의 말을 훔쳐 탄 느낌이었다.
동구 밖에서 아버지와 이별을 한 뒤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향하는 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버스 정류장에 멈춰 되돌아보는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 돌리기를 몇 번이나 하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꼿꼿한 자태를 잊을 수 없어 공부 내내 군 생활보다 참기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집에서 며칠만이라도 쉬고 가겠다는 내게 아버지는 왜 내려왔느냐고 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공부 장소를 옮겨보려고 왔습니다”라며 군색한 답변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어디로?”라고 하셨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순간적으로 “동화사에 가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마루에 걸터앉았던 아버지는 용수철처럼 일어서면서 “그래 가자”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내게는 한여름 검은 뭉게구름 속을 내리치는 천둥 번개 소리 같았다. 8월 중순 초저녁 땅거미가 내릴 때였다. 나도 일어났다. 자고 내일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 말씀, 저녁이나 먹고 가야지 하는 어머니의 울먹이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재촉하는 아버지, 나는 그로부터 3개월 후 법원서기보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의 추상같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 용맹스럽던 아버지가 그립다. 나태해질 때마다 떠올리던 아버지, 왠지 오늘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군에서 편한 생활만을 연상하는 아들의 장래가 걱정돼 아버지를 더욱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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