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상호]“비리 땐 사직” 방위사업청의 서약이 공허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27일 오전 9시 서울 용산구 방위사업청 대회의실. 노대래 청장 이하 과·팀장급 이상 직원 160여 명이 속속 들어섰다. “나는 금품이나 향응 수수로 적발되면 스스로 사직할 것을 서약합니다.”

참석자들은 비리 부정에 연루되면 옷을 벗겠다는 ‘청렴실천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부패척결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모든 직원이 서로 청렴도를 평가하고, 특정 부서에 총 5년 이상 근무한 자는 추후 다시 근무할 수 없도록 하는 등 관련 대책도 발표했다.

2시간 남짓한 행사 내내 분위기는 침통했다. 최근 일부 직원이 식자재 군납업체로부터 수천만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경찰에 적발된 뒤 방위사업청은 초상집 분위기다. 군납비리 근절을 내걸고 창설된 방위사업청이 비리의 온상으로 추락해 군 안팎에서 따가운 눈총과 불신을 받고 있다.

토요일에 전 직원이 불려나와 자정결의 선언까지 하게 된 것은 방위사업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부패와 비리를 발본색원하려면 끊임없는 내부감시와 견제가 필요하지만 방위사업청은 이를 도외시했다.

방위사업청은 두 달 전 본보가 햄버거 빵 등 식자재를 군에 납품하는 A사에 대한 특혜 의혹을 보도하자 “절대 그런 일 없다”며 반박했다.

▶본보 6월 9일자 A14면
장병 먹을거리로 장난쳤는데… 햄버거빵 제조일자 허위표시 군납업체 적발

오히려 방위사업청은 A사를 이상하리만치 싸고돌았다. 올해 4월 방위사업청 감사관실은 햄버거 빵의 제조일자를 속인 A사를 적발해 해당 부서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지만 며칠 뒤 열린 군수조달실무위원회는 계약을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A사가 20년 넘게 군에 납품을 해왔고, 사안이 경미한 데다 당장 계약을 해지하면 햄버거 빵 납품에 차질을 빚는다는 게 이유였다. 더 나아가 한 달 뒤 A사는 햄버거 빵과 패티(고기를 다져 동글납작하게 빚은 것) 등 50억 원대의 군납 식자재 입찰에서 공급업체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장병의 먹을거리로 장난을 친 A사에 엄중한 처벌은 고사하고 특혜를 줬다는 비리 의혹이 제기됐지만 방위사업청은 적법 절차를 거쳐 문제없다고 했다. 방위사업청 직원에게 납품원가를 올려주는 대가로 수천만 원을 건넨 혐의로 적발된 비리 업체가 바로 A사다.

노 청장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고 했지만 부패와 비리의 ‘검은 싹’을 보고도 대충 넘겼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군납 비리 척결의 지름길은 일회성 이벤트나 단기대책이 아닌 스스로 뼈를 깎는 실천이다. 그 첫 단추는 군 안팎에서 돌고 있는 각종 군납비리와 특혜 의혹을 방위사업청이 먼저 철저히 조사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