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김정일 中-러 앞서 한국 신뢰부터 먼저 얻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2일 03시 00분


이정은 정치부
이정은 정치부
폭설과 한파가 이어지던 2009년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유럽에 경악할 뉴스 하나가 전해졌다. 우크라이나와 가스 가격을 놓고 협상을 벌이던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유럽행 가스의 80%가량이 우크라이나 가스관을 통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 조치는 유럽 국가들에 직격탄이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포함한 17개국이 당장 가스 공급의 전면 중단 혹은 심각한 부족사태에 직면했다. 동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공장과 발전소 가동이 중단됐고, 수만 명이 혹한에 떨었다. 불가리아는 에너지 공급을 위해 가동하지 않던 원자력발전소의 재가동까지 검토했다.

9년 만에 이뤄지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서 가장 관심이 쏠리는 양국 정상회담의 의제는 북한을 경유해 한국으로 연결하는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다. 3국이 모두 ‘윈-윈-윈’ 할 것으로 평가받는 이 사업은 2006년 논의가 시작된 이후 아직까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바로 대북 투자 리스크 때문이다.

과거 유럽의 가스 대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이런 식으로 한국으로 들어가는 가스관을 중간에서 끊어버릴 가능성을 걱정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러시아가 그럴진대 늘 예측 불가능을 대외 협상의 무기로 사용하는 북한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한국의 금강산 재산권 처분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불신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믿을 만한 사업 파트너로서 신뢰를 쌓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식의 경제협력도 기대할 수 없다. 중국이 6월 북-중 황금평 공동개발 착공식을 해놓고도 추가 투자를 미룬 채 미적거리는 이유도 대북 투자에 대한 기대감이나 신뢰가 높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한이 자유무역지구를 만든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올 리 없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국제 경협에 요구되는 문서를 작성하고 해석하는 능력부터 부족하다”며 “경제협력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스스로 대외적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계속해서야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북한이 이번 김 위원장의 방러를 통해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찾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세를 바꿔 국제사회에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그 시작은 남한과의 신뢰구축 및 관계개선이다. 가장 큰 우군이 될 수도 있는 파트너 국가를 코앞에 두고 굳이 먼 곳까지 돌아가는 북한의 행보가 안타깝다.

이정은 정치부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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