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우체국 지하보도엔 기둥마다 1부터 21까지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된 노숙인들의 영역 표시다. 기둥 사이엔 남루한 행색의 노숙인들이 잠들어 있거나 폐지며 옷가지가 널려 있다. 인근 상인은 “밤이면 험상궂은 노숙인들이 술판을 벌이거나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남자도 혼자 다니기 섬뜩하다. 여성들은 계단을 내려왔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올라간다”고 말했다.
서울역 주변의 노숙인은 2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서울역을 이용하는 승객과 외국인에게 불쾌감을 줘 서울의 인상을 흐려놓는다. 최신형 KTX 열차에서 내려 현대식 역사(驛舍)를 빠져나온 외국인들은 서울의 빌딩 숲 앞에 펼쳐진 난민(難民) 풍경에 당혹해할 것이다. 철도공사(코레일)는 다음 달부터 물리력을 동원해 노숙인들을 서울역에서 내보낼 계획이다. 그러나 노숙인을 무작정 내보내면 근처 지하보도와 다른 역사로 몰려가는 ‘풍선효과’가 생길 것이다. 갑작스러운 강제 퇴출보다는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역 주변에 응급센터 임시숙박시설 상담소 등을 설치해 노숙인이 스스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서울역 부근의 노숙인 보호시설은 3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 노숙 습관과 알코올 의존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당수 노숙인은 규칙적인 공동체 생활을 기피한다. 코레일은 장기 노숙인의 건강상태를 관찰하면서 치료와 상담, 설득을 통해 정상적인 삶으로 이끌어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의 사회공헌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전국의 노숙인은 1만여 명에 이른다. 올 3월 노숙인 지원법안을 발의한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당장 복지시설을 신축하는 게 어렵다면 쪽방 고시원 다가구주택 등 소규모 임대주택을 활용해 노숙인의 시급한 주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공근로 같은 간단한 일자리나 사회적 기업 취업 기회를 알선해 홀로서기를 돕는 배려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