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반 동안 미국 특파원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뒤 서울 거리에서 느낀 것은 여성들의 자신감이었다. ‘하의 실종’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는 데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짧은 치마나 핫팬츠를 입고 도심을 활보하는 여성들은 당당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은 거의 없는 듯했다. 개성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스스로 즐기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야 고맙지”라는 혼잣말도 해봤다.
▷장대비가 내리던 그제 서울 도심에서 ‘야한’ 시위가 벌어졌다. 슬럿(slut·성매매 여성을 비하한 말) 워크(walk) 시위의 상륙이었다. 캐나다 경찰이 “성폭행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매춘부처럼 옷을 입고 다니지 마라”라고 한 데 대해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반발하면서 생긴 조어(造語)다. 한국에서도 첫 동조 시위가 열린 것이다. 트위터를 통해 조직된 여성 200명이 섹시한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섰다. 몸에 찰싹 달라붙는 원피스는 비에 젖어 육감적인 몸매를 더 드러냈다. 쇄골을 타고 흘러내린 빗방울은 검은 브래지어 속으로 스며들었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피고인’이나 지나 데이비스 주연의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술을 먹고 흐트러진 모습의 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참가한 자칭 ‘슬럿’들은 사회를 향해 “야한 옷이 성폭력의 원인이 아니다”라고 목청껏 외쳤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옷 입는 방식과 성범죄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없는 어린아이나 할머니가 성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더라도 ‘헤프게’ 입는 옷이 성범죄를 유발하는 주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위를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은 각양각색이었다. TV에서 보이는 아이돌 스타들의 옷차림도 때론 민망할 지경이다. 평소 거리에서도 ‘슬럿워크’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런 시위가 무슨 대수냐는 반응도 있었다. 보기 불편했다는 시선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슬럿워크 시위를 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별로 야하지 않았다”는 불평도 나온다. 한 경찰은 “공연 음란이 되려면 더 많이 벗어야 하는데…”라며 법적 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보려는 게 인간 본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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