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열]한-일 100년의 숙제는 풀고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12일 03시 00분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양국은 신시대 100년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여러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과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부 간 관계는 대단히 양호하다. 양국 국민이 한일관계를 보는 시각도 완만하게나마 긍정적으로 변했다. 반면 양국민 사이에 역사 인식의 차이는 엄존한다. 과거사 문제의 해결 여부에 대한 의견이 명확히 갈라져 있다. 며칠 전 발표된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의 공동여론조사는 이런 흐름을 그대로 확인한다. 미래의 100년을 향해 해묵은 숙제를 또다시 들고 가야 할 판이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눈에 띄는 항목은 일본인의 55%가 과거사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사죄했다고 응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과거사의 내용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강제병합과 식민지지배를 몰랐다는 일본인이 무려 26%, 특히 20대에서는 34%에 이른다. 젊은 세대일수록 과거의 잘못을 모르는 것이다. 이들의 무지는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일본의 기성세대는 한국과의 역사 문제를 외교적으로 처리해 왔다. 본래 동아시아에서 역사 문제는 국제 문제이어서 일본에서 사안이 발생하면 한국과 중국 사회가 반발하여 여론이 비등해지고 일순간 정부와 민간의 모든 교류채널이 마비되며 국제적 갈등으로 비화한 후, 정부 간 외교적 교섭과 타결로 상황이 진정되는 패턴을 보였다. 그러나 역사와의 화해는 기본적으로 국내적 과정이다. 화해의 대상은 상대국이 아니라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압에 대응한 외교적 화해는 전략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지될 수도, 번복될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극우세력을 제외하면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대체로 전쟁 책임을 인정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이 초래한 고통을 아시아 국가에 안겨주었음을 반성한다는 뜻이다. 강제징용, 군위안부 문제, 양민 학살에 대한 인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책임의 인정은 다른 차원이다. 왜냐하면 근대 일본의 정체성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서양화의 표상으로서 제국주의 식민지를 가지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국제적 위신을 높이는 동시에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강제병합을 인정하고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일은 전쟁 책임보다 근본적인, 따라서 더욱 고통스러운 역사와의 화해의 과정이다. 메이지 시기의 빛나는 역사에 수정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이를 회피한다. 젊은 세대가 접하는 역사 문제에 관한 주류 담론은 식민지 책임론이 아닌 전쟁 책임론이고, 식민지 시기는 상대적으로 무지의 대상이다.

100년 전의 비극적 만남을 뒤로하고 향후 100년의 공동번영을 기약하려면 일본의 행동이 우선 돼야 한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말처럼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치지도자의 망언을 억제하고 대외적으로 사죄를 반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역사와의 화해는 주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결행하는 고통스러운 자기혁신의 과정이다. 일본은 자기중심적 민족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좀 더 21세기적 보편성의 시각에서 과거 100년의 역사를 쓸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한국이다. 일본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한국도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역사와의 전쟁을 치렀다. 친일을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 자기혁신을 촉구하려면 한국 역시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정파적 고려가 역사해석을 왜곡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의 분출이 상대국에 대한 오해를 초래하는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럴 때 일본은 한국을 다시 보고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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