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병일]다시 선비정신을 생각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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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스승의 날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배달된 꽃바구니였다. 필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도산서원 부설 선비문화수련원의 선비문화체험 연수(2박 3일 과정)를 다녀간 코리안리 직원들이 보낸 것이었다.

코리안리는 재보험회사로서 외환위기 때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던 상태에서 박종원 대표가 경영을 맡았다. 국내 전문경영인 최초로 5연임을 하며 아시아 1위, 세계 13위의 기업으로 도약시키고 세계 최고 재보험사로의 비상을 꿈꾸는 회사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일류기업이 옛 선비정신을 배우라고 신입사원을 시골 도산서원으로 보내는 뜻은 무엇인가.

올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직장과 사회에서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책임의식을 갖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동양의 오랜 지혜이다. 일찍이 맹자가 말한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親親)으로 사람을 사랑하고(仁民) 만물을 사랑한다(愛物)’는 뜻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에 공감하는 정부부처 및 공사의 기업, 단체에서 작년 한 해 동안 124차례에 걸쳐 임직원 6242명을 선비수련원에 보냈다. 1년 전에 비해 60%가량 늘어난 수치인데 올해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선비체험을 하려고 찾아온다.

선비수련원 참가자에게 가장 인상 깊은 시간은 종손과의 대화이다. 퇴계 종택에서 80세의 종손이 무릎을 꿇은 채 집안 자랑은 전혀 없이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하고, 손수 쓴 글귀인 ‘譽人造福(예인조복·남을 칭찬함으로써 복을 만든다)’를 선물하며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한다.

이육사문학관에서는 70세인 육사의 따님이 새색시처럼 나지막한 음성과 공경스러운 태도로 부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이야기한다. 참가자는 이런 만남을 통해 정성스럽고 겸손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를 맞는다. 그분들이 바로 사람다운 길을 걷고자 했던 옛 선비의 후예이다.

선비는 어떤 사람인가. 평생 배움과 실천 속에서, 큰 스승 공자가 그랬듯 자신이 지닌 사람됨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이 시대에 왜 다시 선비정신인가. 수십 년간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향한 압축성장은 물질적인 풍요와 동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선진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이런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이고 여기에 정신가치의 복원이 필수적이다. 주목할 대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비정신이다. 선비수련 참가자들은 선비정신을 통해 개인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인 겸손 배려 공동체 효도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수련 과정에서 배우고 깨달은 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한다.

옛 선비는 여기 없지만 시대의 요구에 실천으로 부응하려던 정신은 임진왜란의 의병활동과 한말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의사와 열사를 배출하며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말하고 대안을 찾아 나선다. 대안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지 모른다. 종교와 세대 그리고 계층을 넘어서서 선비들이 보여준 가치를 정신적 유전인자로 물려받아 공유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잠자는 선비정신을 깨워내 우리 사회의 위기를 해결할 시대적 가치로 만들고 실천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이다.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전 기획예산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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