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환자들의 아우성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간단한 질환조차 새벽차를 타고 대도시 병원으로 향해야 하는 지역민들의 발걸음은 무겁다. 필수의료와 지역병원은 의사 부족으로 고사 직전인데, 대도시 마천루마다 미용·성형 시술 광고는 넘쳐나고 젊은 의사들은 고소득과 안락을 찾아 개원가로 향한다. 선진국 문턱에 선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2000명 의대 증원. 지난 2년 가까이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이 본업을 놓게 한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전 정부의 과오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크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사 수 부족’이다. 인구 대비 의사 수는 한의사를 포함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중소병원은 물론 대학병원 교수 정원조차 채우지 못해 허덕인다. 지역은 더욱 참혹하다. 민간 병의원은 수익성 악화로 문을 닫고, 공공 병원은 의사를 구하지 못해 고가 장비를 놀리고 있다.
인구 감소를 이유로 의사 감원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출생아는 줄어도 노령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노인은 젊은이보다 3배 이상의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며,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의료 요구는 비례해 상승한다.
의사를 늘려도 필수 분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도 있다. 시장주의 의료 체계에서 대도시와 비급여시장으로 인력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개선해야 할 과제이지, 인력 확충 자체를 반대할 논리가 될 수 없다. 의사 증원이 의료비 폭증을 불러온다는 주장 역시 인과관계가 뒤섞여 있다. 의료비 폭증은 과잉 진료를 부추기는 뒤틀린 제도 탓이다.
의사 부족 해결은 이제 새 정부의 사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숫자만 늘리는 정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증원된 인력이 실제 국민의 생명을 살리는 현장으로 흘러가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혁신 과제가 병행돼야 한다.
첫째, 늘어난 인력이 지역·필수의료에 종사할 기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공공의대 설립과 지역의사제 도입으로 인력 흐름을 공익적으로 유도하고,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거점 공공병원을 대폭 강화·확충해야 한다.
둘째, 영리적 비급여 시장과 엉터리 진료를 과감히 줄여야 한다. 실손보험과 결탁한 과잉 진료를 억제하고, 낭비되던 재원을 지역·필수 의료로 전환해야 한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고 행위별 수가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셋째, 의료전달체계를 재확립해야 한다. 필수의료만큼은 ‘권역-지역-1차-보건소’ 체계 내에서 철저히 연계·협력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무한 경쟁이 아닌 상생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도록 하는 데 공공 병의원이 중심축이 될 수 있다.
넷째, 모든 정책의 동력을 시민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은 특정 직역과의 합의가 아닌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직역 이기주의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투명한 절차로 시민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추진해야 한다.
최근 의료혁신위원회와 시민 패널이 구성됐다. 지역·필수의료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때만이 살아날 수 있다. ‘혁신(革新)’은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수반한다. 지금이 대한민국 보건의료 시스템을 정상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새 정부가 강력한 의지로 이 거대한 전환을 완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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