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일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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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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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력감과 좌절감은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깊어보였다. 지난주 도쿄 출장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자주 위기의식을 털어놓았다. 특유의 ‘겸손과 엄살’도 섞여있겠지만 단순히 그 수준은 넘었다. 도심 곳곳에 길게 늘어선 빈 택시의 행렬에서도 불황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2008년과 지난해 2년 연속 마이너스였다. 최근 경기가 다소 바닥을 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1%대에 불과하다. 나카지마 아쓰시 미즈호종합연구소 전무는 “성장률을 높이지 못하면 재정악화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소비자물가는 올해 2월까지 13개월 연속 하락했고 공시지가는 2년 연속 떨어졌다. 디플레이션의 늪은 기업 수익성과 투자심리, 임금과 고용, 수요와 경제 활력을 모두 떨어뜨렸다.

일본의 국가채무는 이미 862조 엔을 넘었고 2012년에는 1000조 엔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정부 일반회계 지출은 92조 엔인데 세수(稅收) 전망은 37조 엔으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나카오 다케히코 재무성 국제국장은 연도별 그래프를 보여주며 “지출과 세수 간 격차인 ‘악어의 입’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런 불균형이 지속될 수는 없다고 걱정했다.

한국 기업과 정부에 대한 일본사회의 높은 관심과 긍정적 평가는 일본경제홍보센터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한 한국 언론인들이 때로 당혹감을 느낄 정도였다. 우리 일행이 찾아간 곳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삼성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의 활약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일본 기업은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한 과거의 성공체험에 집착한 반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영·마케팅능력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는 분석도 나왔다.

GE와 히타치의 ‘미일(美日) 연합’을 제치고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한 것을 일본에서는 ‘UAE 쇼크’라고 부른다. 이명박 대통령과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의 ‘세일즈 외교능력’과 경제정책 추진력을 비교하는 말도 자주 들었다. 이지마 히데타네 한일경제협회 일본 측 회장과 오쿠 마사유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장은 “하토야마 정부는 추상적 비전만 있고 구체적 성장전략과 정책이 부족한 반면 이명박 정부는 실질적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이토록 철저한 위기의식과 ‘실패 연구’야말로 일본의 저력이다. 히타치의 핫초지 다카시 부사장은 “오일 쇼크가 닥친 1970년대 ‘성장의 한계’라는 말이 나왔고 1980년대 엔화 초강세 때는 산업 공동화(空洞化) 논의가 무성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를 이겨냈다”고 회고했다. 나카지마 전무는 “일본의 미래는 단기와 중기적 관점에서는 어렵지만 10년 정도를 생각하는 장기전망이라면 낙관한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보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의 문제가 모두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일본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기업경영과 정부정책의 강점을 분석해 성공적으로 접목한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경쟁력을 지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본에는 상대방을 칭찬하면서 죽인다는 뜻인 ‘호메고로시’라는 말이 있다. 요즘 일본의 ‘한국 띄우기’가 반드시 이런 성격은 아니겠지만 우리 기업과 정부는 작은 성취에 도취하지 말고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나설 필요가 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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