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바스호트의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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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8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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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리스타의 아침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상쾌했다. 잎마다 눈을 장식처럼 붙인 소나무 전나무들이 설국(雪國)을 연출한다. 인구 10만 명 남짓한 이 도시는 러시아연방 칼미크공화국의 수도다. 카스피 해 서쪽의 유럽 땅에 있지만 몽골계가 많아 친근감이 든다.

1일 오후 옐리스타의 한 식당이 한국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고려대 사회봉사단 18명,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대사협) 소속 봉사단 19명, 현지에서 연수 및 봉사 중인 단국대생 5명이었다. 지도교수 등을 합하면 50명이 넘었다. 현지 출장길에 학생들에게 저녁을 대접한 이기수 고려대 총장은 “대학생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해외로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키르산 일륨지노프 칼미크공화국 대통령에게서 “한국 대학생 봉사팀이 겨울 여름 가리지 않고 찾아와 줘 고맙게 생각한다”는 인사를 받았다.

고려대 봉사단은 옐리스타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바스호트 마을에 머물렀다. 160가구 중 35가구가 고려인이다. 학생들은 부채춤을 선보이고 어린이들과 물 로켓을 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현지 관리가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을 하면 안 된다”며 시비를 거는 바람에 당초 계획했던 농사준비 거들기와 양털 깎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명씩 나눠 고려인 집에서 12일간 숙식을 함께했던 학생들은 마을을 떠나기 전 주민들과 뒤엉켜 울었다. 김지연 씨는 마을 할머니들에게 큰절을 올리다가 눈물이 터져 겨우 일어났다. 집 바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무섭고 샤워도 못해 고생했던 이정원 씨도 헤어지기 싫은 얼굴이다. 한국어를 잊지 않고 한국을 그리워하며 사는 60, 70대 할머니들은 “또 만날 수 있을까” 아쉬워하며 학생들의 눈물을 닦아준다.

가까이서 보니 대학생 해외봉사활동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방학 한 달간 공연 연습 등 준비를 해야 한다. 학교 측의 50% 경비 지원을 받아도 약 100만 원을 내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썼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에 따른 부담감도 크다.

그래도 참여 학생은 해마다 늘어 한 해 2000명 이상이 해외봉사를 맛본다. 대사협의 2, 3주짜리 단기 해외봉사 참가자는 첫해인 1997년 130명에서 2008년 600명, 정부 지원이 확대된 작년엔 910명으로 계속 불어났다. 올해도 900명이 파견된다. 자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대학도 많아졌다. 2008년 사회봉사단을 만든 고려대는 작년엔 1팀 17명뿐이었지만 올해는 8팀 140명을 해외로 보낸다. 현대·기아자동차 포스코 등 대기업과 행정안전부가 각각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김한겸 고려대 학생처장이 “봉사활동을 통해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배우고 온다”고 말한 것처럼 귀국길의 학생들은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 대사협 팀의 강릉원주대 권영수 씨는 “어려운 처지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니 편하게 살려고만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고 소감을 말했다. 해외봉사활동 기사를 읽은 뒤 몇 달을 준비해 참여했다는 고려대 이규평 씨는 “넓은 세상을 느끼게 해준 작은 마을의 할머니들이 무척 고맙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봉사 바이러스’를 주변에 퍼뜨릴 것이다.

옐리스타예술학교 측이 이번에 빌려준 270m²의 빈 강의실은 한국문화센터와 도서관 등으로 꾸며진다. 올여름엔 옐리스타와 바스호트 봉사활동이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것이다.

―바스호트(칼미크공화국)에서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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