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과연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걸맞은 품격 있고 다양한 내용의 방송 콘텐츠를 제공받고 있는가? 결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 1995년 케이블 방송의 도입으로 다채널의 유료방송이 시작된 후 위성방송,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인터넷TV(IPTV) 등 방송 서비스가 계속 늘어나 다매체 시대가 활짝 열렸건만, 이에 반비례하여 시청자는 오히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불만과 피로감이 누적됨을 느낀다.
가족시간대 버젓이 불륜 드라마
현재 시청률 20%를 넘는 SBS ‘천사의 유혹’은 오후 9시에 시작하는 가족시간대의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첫 회부터 정사, 스폰서, 텐프로, 폭력 장면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신혼여행을 간 여주인공이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장면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종말 드라마라고 붙여야 할 것 같다.
다른 예능 프로그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해 TV 프로그램의 대표적 장르인 리얼리티 토크쇼의 경우 연예인이 집단으로 나와 다른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막말을 쏟아내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인데 마치 집단 몽유병에 걸린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이들 프로그램은 대개 말초적인 자극을 바탕으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만드는데, 이러다 보니 제작진이 방송수위를 넘는 이야기를 요구하기도 하고 출연자 역시 거짓 토크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오죽했으면 지난가을 국정감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방송에서 서슴없이 막말을 일삼았던 진행자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막말을 문제 삼아 퇴출까지 운운했겠는가.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방송통신위원회는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내년도 업무보고에서 콘텐츠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막말 방송과 저질 드라마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 ‘주의’ 이상의 법정 제재를 내릴 때 최고 5000만 원의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PD나 작가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다 공익적이고 유익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저널리즘과 마찬가지로 방송 콘텐츠 역시 표현의 자유를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함은 분명하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라는 나무 뒤에 숨어 시청자의 기대수준을 저버린 채 일부 제작자와 출연자만의 프로그램이 갈수록 늘어나 피해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다행인 점은 이제 시청자는 더는 바보상자가 틀어주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시청하는 바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똑똑해져 프로그램의 옥석을 가려내고 문제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준엄한 경고를 보낸다는 사실이다. 20% 내외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KBS의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은 11월 초 출연진의 ‘루저 발언’ 이후 즉각 제작진을 교체하고 사건수습에 나섰지만 시청률이 지금까지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이를 입증해 준다.
가이드라인 엄격하게 적용해야
새해부터라도 방송사는 지금까지의 구태의연한 제작방식을 과감히 버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송사가 자정하지 않으면 시청자에게 더욱 큰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다행히 일부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KBS의 경우 루저 파문 이후 ‘방송의 소재 및 표현에 관한 예능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자체 심의 결과 상습적인 막말과 비속어 사용으로 3회 이상 지적된 출연자는 프로그램에서 퇴출하는 삼진아웃제를 시행하겠다고 한다. 이 규정이 선언적 차원에서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 방송사는 이제 키 작은 남자가 루저가 아니라 질 낮고 막 가는 방송이 루저임을 명심하고 국민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도록 환골탈태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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