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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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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비핵화 완성 전까진 김정일 안 만날 것”
―남북 정상의 10·4공동선언문을 본 소감은….
“한국 정부가 e메일로 갓 발표된 합의문을 보내 줘 잘 읽어 봤다. 그리 잘못된 문서라는 느낌은 없다. 올해 말에 출마할 대통령 후보가 딱히 불만족스럽게(unhappy) 느낄 대목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핵 문제 등 현안을 풀기 위한 돌파구였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을 팔아넘겼다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느낌이다.”
―워싱턴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의 핵 포기 여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지가 공동선언문에 제대로 반영됐다고 보는가.
“북한이 끝내 핵무기를 포기할지 누가 알겠는가. 1992년 남북 간에 체결한 한반도비핵화선언처럼 중요한 합의가 선언문에 인용됐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핵무기 포기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북-미 간 합의는 (2005년 6자회담의) 9·19합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의 우려는 올해 6자회담 2·13합의 및 10·3합의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함한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문구 대신 “모든 핵 프로그램을…”이라는 문구에만 서명한 것에 대한 워싱턴의 불안감을 반영한 말이다. 2005년 9·19합의 때는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이란 문구가 동시에 담겼다.
―정전협정 종식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을 남북이 추진한다는 합의가 있다.
“재미있는 대목이다. 어떻게 귀결될지, 어떤 의미로 3 또는 4라는 표현이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누군가를 늘 적대적으로 대하는 북한 특유의 ‘배제 외교’의 또 다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은 (1994년 제네바 합의, 2003년 북-중-미 3자회담 때는) 한국을 빼야 한다고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검증을 통한 비핵화가 완성되기 전에 김 위원장을 만나는 정상회담에 참석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북한의 중국 견제는 지난해 10월 핵실험 이후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한 뒤 두드러졌다는 시각이 있다.
“내가 협상에 참가한 2003∼2004년에도 북한은 늘 중국을 불편해했다. 북한이 고립된 5 대 1의 구도는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는 (한국과 중국 정부가 북한을 거드는) 3 대 3, 혹은 (중국만이 북한을 감싸는) 4 대 2 구도 등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북한만 고립되는 5 대 1 구도가 너무 선명할 경우 북한은 협상장에 나오지 않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이 핵실험 전후에 ‘북한 핵 문제를 외교로 푼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당신이 협상을 주도했던 1기 행정부 때는 “북한의 나쁜 행동을 보상할 수 없다”는 딕 체니 부통령의 말로 대표되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미국이 갑자기 협상 중시로 나선 게 아니다. 미국은 2004년 6월 지금처럼 북-미 간에 주고받기 식 협상 방식의 원형이 됐던 ‘6월 제안(June Proposal)’을 내놓았다. 초기에는 협상의 절차를 만드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는 점에서 초기 진통도 의미를 둘 수 있다. 지난해 이후 부시 대통령의 대북관이 달라졌다기보다 협상 스타일의 변화로 보면 될 것 같다.
체니 부통령의 말은 ‘북한 혐오’를 워싱턴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단순화는 정치적으로 눈길은 끌지만 본질을 흐릴 수 있었다. 누가 나쁜 행동을 보상하고 싶겠나. 그러나 외교는 큰 결과를 위해 나쁜 행동일지라도 단기적으로, 제한적으로 보상해야 할 때가 있다.”
―북한이 그토록 부인하던 고농축우라늄(HEU) 해결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마침 오늘(인터뷰를 한 4일)이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당신에게 우라늄 핵을 시인한 지 꼭 5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이 그날이란 사실은 잊고 있었다. (원심분리기 제작에 쓰이는) 고강도 알루미늄 이야기는 내가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이에 대한 ‘사소한 시인’이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한 진전이다.”
북한은 최근 제네바 회동에서 미국 정부에 중요한 우라늄 농축 장비의 일부인 알루미늄 튜브를 수입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이 미국 중국 러시아 전문가를 초청해서 알루미늄 튜브가 어디에 쓰였는지 등을 보여 줄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제임스 켈리조차 북한이 우라늄 핵 개발을 했다는 미국 정부의 증거를 확신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는 2002년 10월 평양에서 비밀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항의했다. 나는 HEU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 일각에서 (무기 제조용이 아닌 실험용 수준의) 저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우라늄 농축 활동도 비핵화 합의를 깨는 심각한 문제였다.”
제임스 켈리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역대 공화당 행정부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을 담당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후기 및 조지 부시 대통령 초기에 백악관에서 동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냈다. 같은 해사 출신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의 추천으로 1기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온화한 성품으로 ‘부처’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현재는 컨설팅회사인 EAP 어소시에이츠 대표.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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