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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8월 1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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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뇌리엔 영화 속 두 개의 소품이 각인되었다. 열쇠와 책상! 라라가 대문 앞 낡은 기둥에서 벽돌 한 장을 빼내고 꺼내 들던 열쇠와 추운 밤 손가락 끝마디가 나온 장갑을 끼고 라라에게 편지를 쓰던 지바고의 서랍 많은 책상, 그 둘이 내 삶의 잊지 못할 이미지가 됐다.
어쩌다 집 구경을 꽤 하며 살았다. 주인의 세계관이 집안에 어떻게 반영됐나를 은근히 살피다 보니 집의 공기를 느낄 줄 알게 됐다. 그 기준이 바로 열쇠와 책상이라는 걸 알고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좁거나 낡아도 열쇠와 책상을 가진 집은 좋은 집이었다. 열쇠는 가족간의 은밀하고 따스한 유대이고 책상은 갈등과 화해와 소통의 역사일 것이다. 그게 쌓인 집은 설령 한 귀퉁이가 삭아 내린다 해도 향훈이 감돌았다. 첫 아기가 태어난 집, 부모님이 사시던 집, 젊은 부부가 첫 꿈을 함께 꾸던 집은 그 추억만으로 집에 품격이 얹혔다. 그런 집은 쉽사리 팔아 치울 수가 없다. 어쩌다 피치 못해 이사를 갈 일이 생기면 집을 두고 가기 싫어 온 가족이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러고 보니 이사 가면서 우는 사람이 있단 말을 요즘 통 들어 보지 못했다. 집과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면 사람과도 사랑을 주고받기 어려울 게 뻔하다. 아이들의 커 가는 키를 기록한 문짝, 걸음마를 배울 때 부딪쳐 넘어지던 기둥, 이빨 자국이 남은 계단 참, 그런 게 남아 있는 집이 귀한 집이다. 보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집도 가족의 역사가 새겨지면 보물의 되어 금전 가치를 뛰어넘는다. 사람들이 제각기 고작 평당 몇 천만 원씩으로 계산되는 재산이 아니라 평당 수억 원을 줘도 못 파는 보물을 가졌으면 좋겠다. 남의 보물은 내 보물과 다르니 그토록 소모적으로 서로 키를 잴 필요도 없으리라.
어느 피자 배달 소년이 하던 말을 오래도록 잊지 않는다. “현관에 들어서면 그 집안 특유의 냄새가 나요. 화목한 집은 따뜻한 냄새가 도는데 하도 좋아서 한참씩 서서 그 냄새를 맡아요. 그런데 그런 집이 생각만큼 흔치를 않아요.”
강남 아파트 서른 평이 얼마 얼마라는 소문이 무성하고 공간이 돈이란 것쯤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게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그 공간을 얻기 위해 우리가 평생을 허덕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몇 년을 허덕거려 한 평을 불리고 다시 몇 년을 일해 두 평을 불린다? 그렇게 불려 놓은 공간에 정작 들어앉을 시간도 없이 바쁘기만 한데도? 이제 집은 쓸모나 안락보다 넓어 보이는 게 더 절실한 미덕이 돼 버렸다. 같은 평수로 더 넓어 보이는 걸 궁리하는 안목치수라는 것도 생겨났다.
무조건 넓기만 하면 다 좋은가?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살갗을 비비댈 때가 혹 더 살만하진 않았나? 아무리 넓어도 훈김 돌지 않고 썰렁하면 무슨 소용? 내가 아는 집에 관한 비밀이 하나 있다. 면적이 좁을수록 덥히기가 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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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도 물리법칙과 같다. 집을 키우려고 밤늦도록 일하는 대신 식구들이 다리를 펴고 앉아 ‘이 거리 저 거리 각거리’를 하며 노는 게 더 잘사는 법 아닌가. 소유의 경제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자그마한 열쇠와 조붓한 책상으로 얼마든지 충만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닥터 지바고’를 볼 수 있는 세상인데 무얼 더 바라랴.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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